[황성혁의 造船史] ⑤”유연한 사고와 깔끔한 마무리가 조선 르네상스 원동력”
또 한번의 위기가 왔다. 1998년의 외환위기다. 나라의 형편이 좀 좋아지는가 싶으니 돈놀이가 시작되었다. 상호신용금고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기고 이들은 금리가 싼 외국 돈을 빌려다 한국에서 높은 이자로 빌려주기 시작했다. 신용금고 자신들의 신용도 부실한데다 이자만 좇아 돈을 빌려주다 보니 부실채권이 쌓이고 외채를 갚지 못하는 사태가 일어나서 그 액수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IMF가 개입을 했고 한국의 국가적 신용이 부도가 나는 치욕적 사태가 벌어졌다. 한국의 폭발적인 성장에 뒤따라 온 금융위기를 바라보던 외국인들은 “한국은 이제 끝났다”고 단정했다. 한국이 위기를 먹고 자라는 불사조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 위기를 금융체질을 한층 강화하는 단계로 삼았고 금융산업도 한 단계 도약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런 뒤 한국의 조선공업은 거침없이 세계제일의 자리로 올라섰다.
독자들은 2003년을 기억할 것이다. 세계 조선산업에서 가장 기억될 해이다. 역사상 최고의 호황이 시작된 해였다. 보통 조선의 호황은 1년 길어야 2년 정도 계속되고 4~5년의 불황이 지속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2003년 시작된 호황은 2008년까지 계속되었다. 역사상 없었던 일이다. 선주들은 한국조선소의 선대를 잡기 위해 큰 웃돈을 내었다. 중국은 조선소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생각하고 엄청난 투자를 했다. 선주들도 Bulk Carrier에 집중투자를 했다. 항상 반복되는 문제이지만 선주가 아닌 투기자본들이 대거 진입했다. 배 한 척을 지어 놓으면 2~3년 사이에 몇 십 퍼센트의 폭리를 볼 수 있다는 꿈으로 자산을 있는 대로 선박건조에 쏟아 부은 것이다. 2008년까지 발주를 계속했던 선주들은 벼랑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현명한 선주들은 2003년부터 2005년 사이에 지은 배들을 2007년과 ?2008년 사이에 팔았다. 한국도 많은 조선소들이 새롭게 문을 열었다. Block 제조업자들이 조선소로 탈바꿈을 했다. 초기에 재미를 보았지만 기술력의 뒷받침이 없는 사람들은 도태를 면치 못할 처지에 이르렀다. 2005년 어떤 분이 제게 조선소를 열겠다고 자문을 해왔다. 내 답은 이랬다. “정말 조선소를 하겠으면 지금 돌관작업을 해서 2006년 안으로 조선소를 완성하고 Cape size Bulker 스무 척을 2008년까지 지어 내시오. 그리고 수리조선소로 전환하시오” 그는 결국 질질 끌다가 조선소를 완성하지도 못하고 그가 평생을 모은 재산을 다 날리고 말았다.
길었던 호황의 끝에 오는 불황은 심각하다. 불황의 기간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암담하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는 또 한번 준비된 사람들의 모습을 돋보이게 하는 기회가 된다. 삼성중공업은 그 중 탁월한 사례다. 자신의 크기에 알맞게 고부가가치 선을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지어내고 있다. 이것은 평소에 지켜낸 기술적 우위와 준비된 관리능력 때문이다. 선주들도 마찬가지다. 상선을 운행하는 현명한 선주들은 모든 사람들이 들떠 발주할 때 오히려 그들이 보유하고 있던 선박들을 가장 높은 가격으로 판다. 그리고는 지금 그들이 확보해 놓은 현금으로 가장 효율적인 배를 가장 좋은 값으로 짓기 시작한다.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이 위기는 진실로 해운, 조선산업의 구조조정을 위해 주어진 기회가 아닌가 생각한다. 준비되지 않은 조선소들은 이제 문닫을 날만 기다리고 있다. 반대로 준비된 조선소는 이 위기가 가신 뒤 올 또 하나의 큰 기회를 위해 도약의 틀을 마련하고 있다.
필자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한국의 준비된 조선소들이 비약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배경, 일본이 쇠락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 중국이 한국을 따라오기 어려우리라는 사실은 막연한 낙관적인 추리가 아니다. 조선산업의 배경과 문화가 다르기 때문이다. 일본사람들은 예스와 노우를 분명히 하지 못한다. 자칫 말 한마디 잘못하면 할복을 해야 하는 사무라이 시대의 전통 때문인지 모른다. 중국은 어떤 일이건 얼버무린다. 딱 부러지게 하는 일이 없다. 가령 내 이름을 두고 보더라도 북경에서는 분명히 ‘황’이라고 부른다. 상해쯤 오면 ‘왕’이 되고 홍콩 이남으로 오면 ‘응’이 된다. 더 시골로 가면 ‘위’라고 발음한다. 이것은 사투리의 문제가 아니고 명확히 할 줄 모르는 문화의 문제 탓이다. 그에 비해 우리의 전통은 사소한 일 하나를 두고도 명확해질 때까지 끝장토론을 한다. 그것은 사리를 따지는 가장 확실하고 평화적인 방법이다.
앞서 필자는 우리 스스로를 “마무리를 지을 줄 모르는 민족” “끝내기가 깔끔하지 않은 민족” 이라고 폄하했다는 말을 했다. 그것은 큰 오해였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처음 우리가 배를 지었을 때 선실의 가구들이 배의 진동에 따라 덜커덕거렸다. 그때 우리는 특별한 검사방법을 택했다. 서랍을 거꾸로 넣어서 빈틈이 없는지를 맞춰보는 것이다. 한번 그렇게 하고 나서 우리의 선실작업의 마무리는 완벽해졌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양궁에서 세계를 제패하고 골프에서 세계 최고가 되는 것은 모두 집중력에서 우수하고 정신적 마무리가 탁월하기 때문이다. 마무리가 잘된 선박은 다른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는 또 하나의 확실히 우월한 무기 하나가 손에 쥐어져 있다. 한글이다. 컴퓨터의 시대에 한글처럼 효율적인 무기가 어디 있을까? 우리가 세종 대왕에게 크게 감사를 드리면서도, 우리 민족성이 이렇게 딱 부러지는 표음문자를 필요로 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한국의 전통이 세계 최고의 조선국을 만든 것이다. 한국의 오늘을 윈스턴 처칠 경에게 꼭 한번 보여 주고 싶다.
놀이를 펼칠 마당은 잘 마련되었다. 이제 그 무대 위에서 빛나는 놀이를 펼칠 일만 남았다. 상선이 공급과잉의 상태에 빠져있는 동안 우리는 특수선의 특수를 이끌어 내어 이익을 내고 번영을 계속해 왔다. 그러나 조선소는 상선을 지어야 한다. 이익이 많이 남는, 남들이 짓지 못하는 배를 지어야 한다. 조선의 기본기술은 이제 한계에 다다랐다. 여기서 안주하면 쉽게 중국에 따라 잡힐 것이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가야 한다. 백척간두 진일보를 하여야 한다. 어느 그리스의 선주대표는 한국대학 강의에서 이런 말을 하였다. “한국은 이제 명실상부 세계최고의 조선국이 되었다. 한국은 또한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핵발전소 건설국이다. 왜 이 둘을 융합하는 작업을 시작하지 않는가.” 이 선주대표의 요청은 요즈음 선주들이 처해있는 어려움을 극명하게 대변하고 있다. 자고 나면 오르는 화석에너지의 값에 어떻게 대처하느냐, 하루가 지나고 나면 구형이 되어버리는 엔진의 성능개발에 어떻게 대처할 것이냐, 또 세계를 종말로 이끌어갈지도 모르는 온실가스의 증가는 어떻게 막을 것이냐에 대한 대책마련이 막연한 선주로서 제기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화석에너지 사용은 이제 한계가 오고 있다. 석유값이 어떻게 변할 것이냐, 연료 소모율을 얼마나 낮출 수 있느냐 하는 것은 근본 해결책이 아니다.
대체에너지 개발은 우리의 장래가 걸린 문제다. 삼성중공업은 오랫동안 이 문제를 연구해 왔다. 곧 좋은 결과가 나오기를 고대 한다. 지난 100여 년간 개선되어 온 선형도 한계에 왔다. 물과 선체와의 계면마찰에 대한 획기적인 기술을 개발하고 그에 대한 특허를 보유한다면 배를 짓지 않고도 그 특허료만으로 최고의 이익을 창출하는 조선소가 될 것이다. 이제 구태의연한 사고와 이에 평범하게 안주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우리의 전통과 문화와 역사가 마련해 준 이 놀이마당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는 유연한 사고, 깔끔한 마무리 감각으로 한 걸음 더 나서야 한다.
흔히 “조선은 개인의 성취를 허용하지 않는 산업이다”는 말을 한다. 다시 말하면 개인은 조선이라는 거대한 조직의 미세한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개인은 그 조직의 움직임에 끌려 다닐 수 밖에 없는 말로도 해석된다. 과연 그럴까? “나는 나의 개인적 성취를 허용하지 않는 산업에 종사하고 있다”고 생각해보라. 그 순간부터 그는 어떤 개인적인 성취도 이룰 수 없는 하잘것없는 부속품으로 전락하고 만다. 안이하게 살려고 할 때 그 말은 옳다. 그러나 오늘날 조선산업 분야에서 개인의 역할은 절대적이고 핵심적이다. 새로운 길은 그에 종사하는 개개인에 태도와 마음가짐에 의해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