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알아듣게 말하는 것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14장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고전 14:5)

바울은 단순히 방언보다 예언이 낫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방언 자체를 문제 삼고 있지 않습니다. 바울이 지적하고 있는 방언의 문제는 ‘남이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알아들을 수 있는가? 알아듣지 못하는가?” 이것이 바울이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핵심입니다.

바울은 왜 예언을 강조할까요? 예언이 방언보다 더 강력한 은사라서? 아닙니다. 예언이 방언보다 더 우월하고 신령한 은사라서? 아닙니다. 방언은 못 알아듣고, 예언은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의 논지를 “방언이냐? 예언이냐?“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해입니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인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인가?” 이것이 핵심입니다.

바울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과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을 구분합니다. 우리는 흔히 ‘방언’ 하면 ‘기도’를 떠올리지만, 바울은 방언과 기도를 동일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2절, 5절, 13절, 18절, 19절, 23절 모두 방언은 ‘말하는 것’으로 되어 있고, 14절에서만 방언은 ‘기도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말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λαλέω (laleo)는 말하다, 선포하다, 선언하다는 뜻의 단어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의 방언은 기도를 포함했겠지만, 주로 설교에 가까운 선포였습니다. 공적 예배의 자리에서 각자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메시지를 전한 것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고전 14:15)

‘마음’으로 번역된 헬라어 νοῦς(nous)는 ‘지성, 이성, 이해, 사고 능력’으로 주로 번역됩니다. 방언으로 기도했으면 자기 생각을 정리해서 정확한 자기 언어로 기도할 줄도 알아야 하고, 방언으로 찬양했으면 가사를 알아듣게 찬양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배 시간에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설교하는 일은 고린도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중세 가톨릭 교회의 예배도 전부 라틴어로 진행되었습니다. 설교도, 찬양도, 기도도 모두 라틴어였기에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다를까요? 무슨 말인지 도무지 못 알아듣게 설교하는 것, 찬양의 음악적인 요소가 너무 강해서 가사 전달이 잘 되지 않는 것, 복음을 증언하는 단어와 표현이 점점 교회 내부에 고립되어 가는 현상, 우리가 정말 깊이 생각해 봐야 하는 문제입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무슨 말인지 도무지 못 알아듣게 설교하는 것, 찬양의 음악적인 요소가 너무 강해서 가사 전달이 잘 되지 않는 것, 복음을 증언하는 단어와 표현이 점점 교회 내부에 고립되어 가는 현상, 우리가 정말 깊이 생각해 봐야 하는 문제입니다.(본문에서) 사진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조선 사대부의 시각적 의사소통에 중요한 역할을 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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