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자유’만큼 어딘가 ‘소속’되는 것에 대하여
고린도후서 3장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 3:17)
누구나 자유를 갈망합니다. 자유롭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유가 주어졌을 때, 그 자유가 내가 원했던 자유와는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고 실망하기도 합니다.
미국 노예해방 당시 적지 않은 노예들이 다시 주인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이 마주한 자유란 익숙한 억압을 벗어나는 대신, 익숙하지 않은 책임과 불확실성을 받아들여야 하는 선택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집트 탈출 이후 이집트의 노예 생활이 그리워졌습니다. 안정감이 그리웠던 것입니다. 광야의 자유인보다는 이집트의 노예로 사는 편이 더 낫겠다고 여겼습니다.
이를 볼 때 인간은 자유만큼이나 어딘가 소속되는 것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자유와 속박을 동시에 원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죄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죄의 유혹을 즐기고 싶은 마음도 동시에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자유가 때로는 불편합니다. 선악과의 맛을 알아버린 이상, 선악과를 이따금씩 먹고 싶은 것입니다.
주님은 구약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우리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자유를 누리기보다 다시 율법과 제도의 속박으로 돌아가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익숙한 틀 속에서 안주하고 싶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이후 1500년 동안 인간은 율법과 제도를 다시 부활시켰습니다. 중세 가톨릭이라는 거대한 종교 시스템이 등장했습니다. 종교 개혁이라는 한 차례 혁신이 있었지만, 500년이 지난 지금 교회는 또다시 제도적 종교기관으로 전락해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자유를 주시는 주님보다 체계적이고 치밀한 종교 제도를 더 편안하게 느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복잡하고 세밀하게 짜인 종교 제도는 우리의 죄성과 더 잘 맞아떨어지는 듯 보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시려는 자유가 불편한 것일까요? 아니면 주님이 불편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다”고 하는데, 우리가 원하는 자유는 ‘주님이 계시지 않은’ 자유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자유는 단순한 해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소속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누리는 친밀감과 소속감이 바로 그 자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