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살 아들의 ‘뚝심과 혜안’, 부산 향토화가 김종식 되살리다
[아시아엔=황성혁 <축복> 등 저자, 황화상사 대표] 김종식 화백의 전집이 나온다. 그의 넓고 깊은 세계가 우리들의 눈앞으로 행복하게 다가온다. 나의 畏友 김헌(金軒)은 이 전집의 발간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 김종식 화백은 김헌의 엄친이시다. 그래서 더욱 이 발간의 어려움과 이 책이 가지는 의미가 피부에 와닿는 것이다.
김종식 화백은 1918년 태어나서 1988년 돌아가셨다. 김환기, 이중섭, 장욱진, 박수근, 천경자 화백들과 같은 우리 현대화단의 제1세대다. 그분들을 생각할 때마다 김동리(金東里)선생의 <밀다원시대>(蜜茶苑時代)가 떠오른다. 일제에 수탈당하고 해방 후의 온갖 편가르기에 찢기고 6.25에 모든 것을 잃고 발가벗겨진 채 한반도 최남단으로 던져져 갈 곳은 다도해에 뛰어드는 일 밖에 없을 것 같던 그 절망의 세대들을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겨낸 세대들이다. 극한의 조건들을 다듬어 우리 예술을 세계적으로 이끈 우리 문화의 선각자들이다.
김종식 화백은 일제 강점기에 동경제국미술대학에 유학하여 뼈대있는 미술을 체득한 정통파 미술인이다. 그는 그림제작을 통해서 말하고, 그림과 더불어 살고, 세상을 버릴 때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중앙 화단을 기웃거리지 않았고, 중앙 화단에서의 허명을 구걸하지 않았다. 향토 화단을 지키며 후진을 양성한 부산을 대표하는 예술인이며 교육가다.
중앙 화단에서 멀리 떨어져 시류에 휩쓸리지 않은 그의 대담한 필치와 강렬한 색채는 한국예술사의 뒤로 밀려나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상태로 매몰되어 있었다. 이제 김종식 전집으로 감추어져 있던 그의 진실한 가치가 부각되어 후배들에게 진면목이 제대로 대접받기를 기원한다.
이번 전집이 더욱 기대되는 것은 김종식 화백의 방대한 양의 드로잉과 스케치가 그에 따라는 수상(隨想)과 함께 수록된다는 점이다. 그는 후배들에게 늘 가르쳤다. “잠잘 때도 스케치북을 머리맡에 두어라. 꿈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도 놓치지 말아라.” 그 자신이 평생 스케치북을 손에서 놓는 법이 없었다.
드로잉도 그렇지만 그의 가로 세로 촘촘히 긋는 선화(線畵)는 그의 특이함을 잘 나타낸다. 그는 말한다. “펜으로 긋는 선과 선 사이에 밝은 빛이 영롱하게 솟아오른다.” 김종식 화백이 주는 무의식적 감동의 대표적 작업이다.
그는 조형(造型)을 두고 고뇌하며, 보이는 형상 너머에 있는 의미를 추구했다. 현실성과 추상성이 구름 위에서 춤추는 학의 군무처럼 불가사의한 형태를 자아낸다. 김종식 화백은 말한다. “그림을 그릴 때 눈이 없어져야 돼. 어둠이 져야 그림이 된다. 나는 벌써 눈이 없어도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이 되었어.” 마치 <금강경>(金剛經)의 ‘사구계’(四句偈)를 듣는 것 같다.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卽見如來). “무릇 눈에 보이는 형상들이 모두 허망한 것이어늘, 눈에 보이는 형상들이 실제 형상이 아님을 알면 곧 부처님을 뵐 수 있을 것이다.”
33년 전 김종식 화백 일생의 작업이 단행본으로 소개되었다. 그것에 만족하지 않은 김종식미술관측은 이번에 통 큰 결정을 내렸다. 김종식 화백의 방대한 유작들을 종합 정리해서 그의 실체를 구현하고 ‘제대로 대접받는 김종식’의 위상을 굳건히 세워보겠다는 것이다. 유화작품은 물론 600여권의 스케치북, 드로잉과 유화작품 2만여점이 망라돼 있다.
세계에 유례가 드문 시도다. 이 작업의 중심에 외동 아들 김헌이 있다. 이제 팔십 나이를 바라보는 그는 일생의 나머지를 엄친의 실체를 밝히는데 헌신하기로 작심했다.
김헌은 대학에서 조선(造船)을 전공한 엔지니어다. 대학 졸업 후 그는 조선소에 취업하여 열악한 한국의 조선공업을 앞장서 이끌어 세계 최고의 자리로 올려놓았다. 특히, 그는 현대중공업 창립 멤버로서 조선소 초창기에 스코틀랜드의 스코트리스고(Scott Lithgow) 조선소에 파견되어 선박건조 기술을 도입하였고 현대중공업의 생산 시스템을 안정시키는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 그 뒤에는 현 시대의 총아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의 기술 도입을 이루어내어 한국 조선공업의 미래를 활짝 연 선각자다. 그의 뚝심과 내면의 혜안 없이는 이루지 못할 일들이다.
이 풍진 세상의 잡다함을 떠난 오늘, 김헌의 뚝심과 혜안은 엄친의 미술관 건립과 엄친의 예술적 세계를 조명하고 그의 작업을 후손에게 전하는 일에 바치려고 한다. 엄청난 자금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그러나 김헌을 아는 우리는 믿는다. 그의 끈질긴 염원이 그가 바라는 대로 결실되어 우리 화단에 하나의 뚜렷한 방향등(方向燈)으로 밝혀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