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혁의 인도기행] ③ 한 중동 여인과의 디스코
느지막하게 일어났다. 오전 10시 식당으로 내려가 아침 겸 점심식사를 들었다. 낮에는 다이아몬드 광산과 나무 위에서 사는 사람들의 마을을 둘러보는 일정이 잡혀 있었다. 계속되는 일정이 좀 버겁고 흥미 있는 대상도 아니었지만 빠질 수도 없었다. 건성으로 따라다녔다. 다이아몬드 광산이라지만 다이아몬드 캐는 광경이나 정제하는 과정도 없이 그저 땅 파는 기계들만 황토 위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나무 위에 사는 사람들의 부락도 그랬다. 나무와 나무를 연결한 다리 같은 통로를 오가며 나무 꼭대기에 지어놓은 집 몇 채를 보고 호텔로 돌아왔다. 좀 쉬고 싶었다.
호텔로 돌아오자 和가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그 동안 마신 물이 안 좋은 것 같았다. 집에서 가져오 설사약과 소화제를 먹으며 사흘째 결혼식 행사에 참여했다. 어둑어둑해지면서 어제 결혼식이 열렸던 곳에서 떠나는 행사가 진행되었다. 결혼식이 벌어졌던 야외 무대 앞에 온갖 꽃으로 장식된 작은 배가 놓이고 어제와 같은 정장 차림의 신랑과 신부가 배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다. 친척들이 그들을 둘러 쌌고, 축하객들은 넓은 잔디밭에 편하게 앉아 식을 즐기고 있었다. 요란한 음악과 민속무용이 함께했다. 신랑 신부는 물론 가족들도 지쳐 보였고 악대들도 첫날 같은 산뜻한 맛이 아니었다.
아내가 견딜 수 없어 해서 방으로 돌아왔다. 和는 혼자 쉬면 나을테니 사람들 만나라며 내 등을 떠밀었다. 주춤거리며 신랑신부가 떠난 뒷풀이 장소로 갔다. 마지막 날이라 모든 손님들이 모여서 마시고 춤추고 명함을 교환하고 있었다.
한 중동 여인이 내게 다가오더니 말을 걸었다. “당신 한국에서 온 Mr.S.H.Hwang이죠” 그렇다고 했더니 그녀는 중동의 선박 중계 회사에 근무하고 있다고 했다. 명함부터 교환하고는 우리의 활동상황을 잘 알고 있다는 이야기며 앞으로 많은 일을 같이 하자는 이야기를 하였다. 결혼식 축제는 끝나고 축하객들의 사업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녀가 디스코를 추자고 했다. 나는 아내가 불편해 방에 누워있고 또 만나야 할 사람들이 많아 정중히 거절했다.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며 다니는데 느닷없이 전혀 모르는 사리 옷으로 성장을 한 여인이 나를 끌고는 디스코 무대로 올라갔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무대에서 그녀의 리듬에 맞출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무대 밑에서 나를 못마땅하게 노려보고 있는 젊은 친구가 있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오늘같은 날 춤 좀 추자는데 안추겠다 잖아요”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남편이었다. 내가 남의 부부싸움 한가운데 들어선 것이었다. 밑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는 친구에게 부드럽게 웃어 보이며 잠깐 그의 부인과 리듬을 맞추고 나서 나는 무대에서 내려왔다. 파티는 시작이었지만 나는 방으로 돌아왔다. 벌써 자정이었다.
1998. 11. 8. (일) Khajuraho-Agra
서울서 가져온 누룽지를 끓여 먹었다. 和의 배앓이는 계속되었다. 9시쯤 의사가 다녀갔다. 인도출장 다닐 때 경험했지만 인도의사들의 처방은 우리에게 아주 잘 들었다. 인도의 약은 순도가 높고 처방도 유럽보다 강하다고 했다. 의사의 검은 얼굴은 주름살이 가득 했고 그의 손은 거칠고 검어 청결치 않아 보였지만 그의 주사 한방과 약 한 봉지를 먹는 순간부터 아내의 상태는 눈에 띄게 좋아지기 시작했다. 긴 여행을 시작하는 날이어서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었다.
오전 9시경 사우랍(Saurabh)은 황금색 가마를 타고 나타난 신부와 함께 양쪽에 종려잎과 꽃무늬를 그린 승용차를 타고 떠났다. 그것으로 3박4일간의 화려한 결혼식은 모두 끝났다. 어떤 이는 결혼식 비용이 백만불 이상이라고 단언했다. 또 어떤 사람은 한 삼백만불은 들었으리라고 했다. 아침 내내 호텔 로비에서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라비 메로트라(Ravi Mehrotra)씨와 그의 부인과 포옹을 하고 작별했다. 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 고마움을 전했다. “감동적인 행사였습니다. 애 많이 쓰셨습니다.” 그는 인도 사람 특유의 겸손한 표정으로 우리가 방문해줘서 결혼식이 한결 빛났고 아이들에게도 평생의 추억이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좀 쓸쓸한 어조로 덧붙였다.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은 무대를 만들어 주는 것이지요. 쇼는 이제부터 그들의 것입니다.”
기차는 카주라호를 떠나 아그라로
외국인들은 대부분 카주라호 공항에서 비행기로 출발했고 다른 사람들은 버스로 잔시(Jhansi)역까지 가서 거기서 기차로 흩어지게 되어 있었다. 잔시에서 많은 사람들과 5시50분 출발 기차를 탔다. 메로트라씨의 친절하고 치밀한 손길은 거기까지였다. 그 다음은 우리가 짜놓은 우리만의 여행이었다.
카주라호 여행을 계획하면서 나는 인도 국영 관광공사에 아그라(Agra)에 도착한 뒤부터의 인도여행 일정을 의뢰했었다. 그들은 전문가들답게 상세한 일정을 짜 주었다. 800 달러에 아그라(Agra) ? 바라나시(Venarashi) – 부처님 유적지 ? 파트나(Patna) – 뉴델리(New Delhi)까지의 여정을 책임지기로 하였다. 비용은 호텔비와 일체의 교통비가 포함되고 육지에서 움직이는 것은 중형세단 앰배서더(Ambassador) 한 대에 영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는 운전사가 따르며 가는 곳마다 현지 관광요원의 안내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기차는 아수라장이었다. 짐을 간신히 싣고 자리를 잡았다.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저 어서 그 아수라장에서 벗어나 아그라에 도착하기만 고대했다. 10시에 드디어 아그라에 도착했다. 다행히 和는 많이 회복되어 있었다. 내리는 것도 전쟁이었다. 기차 가득한 사람들을 밀치고 통로에 가득한 짐들을 넘어 간신히 우리들이 짐과 함께 내리자마자 기차는 떠났다.
어느새 우리 뒤에 아주 순하게 생긴 이십대 중반의 자그마한 친구가 서 있었다. 버마(Verma)라고 했다. 그는 짐에다 딱지를 붙이더니 화물 운반원들에게 맡기고 우리만 데리고 군중 속을 지나 그의 차로 안내했다. 기차 속에서의 고생은 그를 만남으로서 끝이 났다. 그는 우리를 역과 그 주변에 있는 모든 군중으로부터 격리시키고 마치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편안하고 조용하게 자동차로 이끌었다. 자동차는 인도에서 생산되고 있던 제일 큰 세단인 앰배서더(Ambassador)였다.
우리가 자리를 잡고 앉자 그는 처음으로 어눌한 영어로 입을 열었다. “잠깐만 쉬십시오. 짐을 가져 오겠습니다” 십 분쯤 뒤 그는 짐꾼들과 함께 우리 짐을 트렁크에 실었다. 그의 행동은 균형이 잘 잡혀 있었고 믿음직해서 짐을 검사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운전석으로 돌아와 앉아서는 그는 조용히 차를 몰아 나갔다. 버마는 마치 그가 거기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 두 사람만의 편안한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클락스(Clarks) 호텔이 예약되어 있었다. 和가 아직 완전하지 못하고 내일 타지마할(Taji Mahal)을 본다는 기대로 호텔 도착 즉시 간단한 식사를 하고 목욕 후 깊이 잠들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