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혁의 인도기행] ⑦ 생사 축복의 성지 ‘갠지스강’
1998. 11. 11. (수)? 바라나시(Vanarasi)에서 보드가야(Bodhi Gaya)로
아내가 깨워서 간신히 일어나니 새벽?5시였다. 벌써 짐은 다 꾸려져 있었고 떠날 준비가?되어 있었다. 和는 조그만 보따리를 별도로 준비해 놓았다. “뭔데” “갈아입을 옷” 아 이 여자가 갠지스강에 들어갈 생각이구나.
싱(Singh)의 차에 올라 갠지스강에 도착한 것은 5시 반경이었다. 강의 동편 낮은 언덕이 희뿌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강가에는 벌써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인도 사람들의 영적인 고향, 갠지스 강. 모든 농사는 갠지스의 물로 이루어지고 갠지스의 범람으로 땅은 풍요로워졌다. 갠지스에 몸을 담그면 지상의 악업이 씻겨 소멸된다고 믿는 인도사람들에게 갠지스 방문과 거기 몸을 담그는 것은 일생의 염원이 되었다. 강가에 도착하자마자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달려들었다. 우리는 그 중 젊고 순해 보이는 뱃사공을 골라 배를 탔다. 그러자 커다란 바구니를 든 젊은 친구가 다가왔다. 빨간 꽃잎과 작은 초를 담은 손바닥만한 유등(流燈)을 팔고 있었다. 미화 1달러씩을 주고 열 개를 샀다.
배가 하류로 천천히 흐르기 시작했다. 아내는 가족과 가까운 친척들을 위하여 촛불을 밝힌 뒤 유등을 하나씩 물에 띄워 보냈다. 유등은 우리 배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유유히 갠지스 강위를 흘러갔다. 뱃전에 유등장사와 선물장사 배들이 끊임없이 접근해 왔다. 유등 몇 개를 더 사서 띄웠다.?시간이 일러서인지 배를 타고 나선 사람들은 드물었다. 30분쯤 흘러 내리던 배가 되돌아올 때쯤 길게 물 위에 햇살을 드리우며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강변의 잡다함이 소음과 함께 확실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강변 여기저기서 장작더미가 그 위에 시신을 얹은 채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장작의 높이는 가진 재물의 크기에 비례한다고 했다. 돈이 많은 사람 집 시신은 더 많은 장작으로 더 잘 태우게 되고 적은 장작밖에 살 수 없는 사람은 그 장작의 불만큼 시신을 태운다는 것이다. 완전히 연소된 시신이건 덜 탄 시신이건 시간이 되면 그 자리를 다음 차례에 넘겨주고 갠지스강에 던져진다. 그리고 그들의 영혼은 다음 세상으로의 여행을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화장장 바로 옆 상류는 사람들로 들끓었다. 방파제 위에서는 남자들이 아랫도리만 가린 채 물로 뛰어 내리고 있었고 여인들은 머리까지 사리로 감춘 채 온몸을 물에 잠그고 있었다. 불탄 시신이 강으로 되돌아 가는 바로 그 곁에서 산 사람들은 생명의 축복을 위하여 탁한 성수에 잠기고 있었다. 뭍으로 오른 뒤 아내는 머뭇거렸다. “왜 강에 들어가지 그래” 나는 짖궃게 다그쳤다. 갠지스에 몸을 담그겠다고 작심한 그녀도 시신이 떠 있는 것을 보고는 선뜻 물에 뛰어들지 못했다. 강가 계단에 앉아 꼼꼼하게 신과 양말을 벗은 뒤 발을 물에 담그는 것이었다. 나는 또 선언했다. “이제 장화자 선생의 발은 이 지상의 모든 악업으로부터 해방되었노라.” 그 곁에서 사람들은 물에 잠길 뿐 아니라 그 물로 양치를 하고 그 물을 마시고 있었다. 해는 높이 떠올랐고 7시 반이 었다. 싱(Singh)이 나타났다. “차를 바나라시 시내에 두었으니 한 20분쯤 걸으셔야겠습니다.” 반가운 제안이었다. 갠지스 강변의 마을을 구경하게 된 것이다.
강가의 부산한 중생 한 가운데를 지나 골목길로 들어섰다. 거기는 힌두대학과 사원들이 있었고 부자들의 별장도 있었다. 집과 집 사이 구석 공간에는 도사들이 앉아 있었다. 붉은 옷을 입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노란 시들어 버린 꽃다발을 목에 건 도사가 당당히 앉아 있었다. 하얀 회칠을 한 얼굴의 이마에는 빨간 칠을 했고 추한 수염이 아무렇게나 자라고 있었다. 천원쯤 되는 돈을 그의 무릎 앞에 놓자 느닷없이 우리에게 축복을 내리겠다고 일어서는 것이었다. 우리는 뒤도 돌아 보지 않고 도망쳐 나왔다.
그렇게 인류문명의 발원지 갠지스강을 지나왔다. 수 천년 동안 그 모습을 지키고 있는 인류의 성지를 그저 지나왔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래 아쉬워하지 말자. 떠나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