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혁의 인도기행] ② 필요 이상으로 따뜻한 곳

카주라호 사원앞에서 선 황성혁(필자) 부부.

1998. 11. 6. (금) Khajuraho

7시에 아침을 먹고 호텔 로비에 앉아 넓고 밝은 잔디밭을 한참 동안 내다 보았다. 아내와 함께하는 꿈같은 여행이었다. 인도에 무수히 출장을 다녔지만 그것은 가슴의 반쯤이 빈, 언제나 쫓기는 듯한 종종걸음이었다. 인도라는 나라의 넓음과 인도인들의 길고 긴 삶을 아내(和)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그 꿈을 메로트라씨가 이루게 해줬다.

낮에는 관광이 계획돼 있었다. 9시30분 호텔을 떠나 카주라호(Khajuraho)사원으로 향했다. 서기 10세기경 중부 인도 작은 왕국의 왕자가 수도인 카주라호에서 비쉬누(Vishnu)신에게 바치는 매혹적이고 수려한 85개의 사원을 세웠으나 회교도들이 파괴하고 지금은 20개 정도의 탑이 남았다고 했다.

사원이 도시 그 자체였다. 히말라야 설산의 형상을 본떴다는 높다란 탑을 중심으로 사원들이 형성되었다. 위대한 인도 장인들의 보석보다 소중한 절묘한 조각들이 빈틈없이 새겨져 있다. 발가벗은 남신과 여신들이?성적 쾌락의 절정을 즐기는 형상들이었다. 그것은 돌이 아니라 바로 피가 돌고 있는 육신 같았다. 쾌락의 신음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카주라호 시내 한가운데 네거리에는 돌에 생명을 불어 넣고 있는 장인의 동상이 있었다. 화강암을 떡 주무르듯 했던 인도의 장인 정신이 거기서 기려지고 있었다.

1800년대 중반 청교도적인 영국 탐험가들이 나무와 넝쿨로 감추어진 도시의 한 자락을 들추어 내어 발굴을 시작했다. 도시의 완전한 모습이 나타났을 때 그것은 그들에게 경악이었다. 그들은 이 도시를 “저주받은 도시” “세상에서 가장 부도덕적인 유적”이라고 타기했다.

그러나 오늘 밝은 햇살 속을 거닐고 있는 나그네에게 그 신전들은 저주의 상징이라기보다 인체를 극단적인 아름다움으로 표출한 걸출한 세계적 문화유산으로 보였다. 인도 곳곳에 있는 장대한 힌두교의 신전을 보면 눈에 띄는 곳은 시바나 비쉬누 등의 주신을 엄숙하게 모시고 있었지만 탑의 아래쪽 구석에는 적나라한 성(性)의 교접 장면을 반드시 한두 군데씩 만들어 놓고 있었다.

조각가들도 구석에 한두 개의 심심풀이를 만들어 둠으로써, 완강한 돌과 함께하는 고단한 삶에 약간의 해학을 곁들인 것이 아니었을까. 유적을 보러 갈 때마다 중심 부분을 보기보다 나는 그 구석의?해학적 부산물을 찾는 것이 더 즐거웠다.

우리는 옛날부터 알던 친구들, 또 여기 와서 사귄 친구들과 여유롭게 그 넓은 사원을 돌아 보았다. 관광 안내서에서, 인도의 문화 소개서에서 읽어 왔지만 이런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오기 힘든 곳이었다. 수 백 명의 관람객들이 사원의 구석구석을 들여다 보며 물결처럼 흘러 다녔다. 그 유품들의 부도덕성에 낯을 찡그린 사람이나 고개를 돌리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남자건 여자건 모두 밝은 얼굴들이었다. <India Discovery>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필요 이상으로 따뜻한 곳(A little warmer than necessary)”

땅거미가 깃들면서 신랑 신부를 위한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여행을 다니면서 요란한 결혼식을 많이 보았다. 카이로에서는 시가지를 떠들썩하게 하는 고적대를 앞세운 결혼행렬을 보았다. 결혼행렬에서 뿌리는 동전을 줍기 위해 모여드는 큰 군중들과 결혼행렬 뒤를 따르는 친지들, 그것은 요란하고 길고 긴 행렬이었다. 봄베이에서도 비슷한 광경을 여럿 보았다. 저렇게도 요란스러워야 하는 걸까 하며 껄끄러운 마음이었다.

특히 인도에서는 다우리(Dowry) 제도 때문에 그 요란한 결혼식이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비극적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고 신문들은 알리고 있었다.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신부 측에서는 신랑 측에 감당할 수 없이 많은 선물을 약속한다. 우선 훌륭한 결혼식부터 하고 보자는 생각이다. 꿀 같은 시간이 지나면 신부는 약속된 선물에 대한 재촉을 받게 된다. 선물이 준비되지 않으면 신부는 시댁 식구들로부터의 혹독한 핍박을 받게 되고 결국 분신 자살까지 강요되는 것이다. 축복받은 결혼식에 무슨 방정맞은 생각이냐고 자책을 하면서도 너무 호화스런 결혼식에 대해 걱정부터 앞선 것이다.

그것은 색깔의 잔치였다. 왕처럼 꾸민 신랑은 흰옷에 호화찬란한 터번을 쓰고 보석이 박힌 긴 칼을 차고 나타났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신랑은 휘황찬란한 횃불에 인도되어 코끼리를 타고 시내를 돌았다. 붉은색 노랑색 인도 특유의 풍물대에 영국식 브라스밴드까지 동원되어 행렬을 따랐다. 온 동네가 떠나가는 것처럼 요란했다.

나는 느닷없이 분장실로 끌려들어가서는 붉은색 터번을 쓰게 되었다. 담당자는 긴 비단을 한겹 한겹 머리에 말아 올리고는 멋지게 묶어주었다. 세계의 해운관련 주간지 월간지들이 몰려들어 사진을 찍어댔다.

신랑이 시내 행진을 마치고 돌아오자 신랑처럼 호화스럽게 차린 신부가 나타났다. 자그맣고 곱상한 전형적인 인도 미인이었다. 호텔의 앞마당 끝에 커다란 무대가 설치되고 거기 신랑과 신부가 함께 올랐다. 참으로 아름다운 커플이었다. 동화 속의 왕자와 공주가 거기 있었다.

여러가지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민속공연이 시작되었고 곳곳에서 끝이 없이 계속되었다. 신랑의 아버지 어머니는 나의 터번을 보며 인도사람보다 더 멋있다고 놀려대었다. 자정이 넘어도 자리를 뜨는 사람이 없었다. 나와 아내는 살그머니 빠져나왔다. 볼 것도 충분히 보았고 만날 사람도 충분히 만났고 또 쉴 수 있을 때 쉬는 것도 여행의 가장 중요한 요령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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