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혁의 인도기행] ⑩ 최초의 불교사원 ‘죽림정사’

1998. 11. 12.(목)?Rajigil ? Nalanda – Patna

라지기르(Rajgir)에 도착한 것은 낮 12시30분이었다. 부다가야(Bodhi Gaya)에서 60km 북쪽으로 떨어진 곳이었다. 라지기르(Rajgir)는 죽림정사(竹林精舍)가 있는 곳이다. 싱(Singh)은 케이블카가 있는 곳으로 우리를 데려다 놓고 산꼭대기에서 하얗게 빛나고 있는 사원을 가리켰다.

“저기가 영취산인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의 양산 통도사의 영취산처럼 산 꼭대기가 독수리의 나는 모습 같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었다. 케이블카로 정상을 올랐다. 올라가 보니 그곳은 영취산이 아니고 다보산이라고 했다. 일본 사람들이 세계 평화를 염원하며 ‘묘심사’라는 절을 지었다. 하얗고 빤짝거리는 페인트칠을 한 건물에 반짝거리는 금색 불상들이 있었다. 세계적 대가의 걸작을 본 뒤 이발소 벽에 붙은 싸구려 그림을 대하는 것 갈아 전혀 흥이 나지 않았다.

단지 산정에 앉아 근처를 내려다 볼 수 있어 좋았다. 안내인은 먼 곳 건너편에 점잖게 앉은 산이 영취산이라 했다. 거기 나무 밑이나 동굴에서 부처님이 머물며 가르치고 걸어 오르내리며 중생들로부터 탁발을 하셨다는 곳이다. 임금님도 부처님을 뵙기 위해 걸어 오르내렸다고 했다. 안내인은 영취산을 가리키며 보이지도 않는 굴과 나무들을 설명했다.

사실 싱(Singh)의 생각이 옳았는지 모른다. 제법 지친 상태에서 가파른 산을 걸어 오른다는 쉬운 일이 아니고, 오히려 건너편 산에서 바라보며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 같았다. 곧 내려왔다. 라지기르(Rajgir)에서 가장 큰 관심사는 죽림정사의 옛터를 보는 것이었다.

부처님은 녹야원에서 최초의 승려 다섯 명에게 “전법(傳法)하러 떠나라”고 이르고 자신도 전법의 길에 떨쳐나선다. 부다가야(Bodhi Gaya)로 돌아와 목숨을 걸고 배화교 집단으로 들어가 천 여명의 이교도를 개종시킨다. 최초의 전법 운동 성공이다.

그들을 이끌고 라지기르(Rajgir)로 행진한다. 거기서 밤비사라 왕과 12만 명의 시민이 부처님에게 무릎을 꿇고 힌두교를 버린 뒤 불교에 귀의한다. 부처님의 설법으로 그들은 모두 지옥에서 해방되는 희열을 안고 성자의 길로 들어선다.

부처님은 라지기르(Rajgir)를 중심으로 살고 있던 천민 50만 명을 귀의시켰고 부처님의 불교는 전 인도 대륙으로 불길처럼 번져간다. 밤비사라 왕은 부처님과 그 사도들을 위해 대나무가 울창한 숲에 절을 지어 드린다. 죽림정사라 불리우는 최초의 불교사원이다.

왕국은 폐허가 되었다. 왕국의 유적들이 주춧돌로 남아 있었다. 대나무 숲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절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넓은 깔란다까 연못이 부처님의 자취였다. 그 조용한 연못을 한 바퀴 돈 뒤 나무그늘 아래 앉았다. 부처님과 사도들 그리고 중생들이 마시고 목욕하던 물이었다. 그 물에 아직도 부처님의 체온이 남았을까. 부처님이 대중을 가르치던 곳, 그래서 가장 많은 불경에 인용된 곳이었다.

부처님은 모든 것이 공허하다고 가르치셨지만 정말 여기는 공허 그 자체였다. 그렇게 흔한 사람들도 오늘 그 근처에는 자취가 없었다. 완벽하게 텅 비어 있었다. 혹시 무슨 소리가 들릴까 눈을 감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대나무 숲을 스치는 서늘한 바람 소리가 옛날처럼 거기 있었다.

싱(Singh)이 다가왔다. 떠나자는 신호였다. 그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15시 40분 북쪽으로 향하는 길가에 자리잡은 호케 라지기르(Hokke Rajigir) 호텔에 들러 일본식 점심을 들었다. 한국인 신도들이 버스 한대에 타고 정신 없이 들이닥쳐서는 정신 없이 떠났다.

우리의 여정도 마자막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다음은 나란다(Nalanda) 불교대학 유적이었다.

나란다(Nalanda)는 라지기르(Rajgir)에서 13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7세기 전성기에는 세로 5km, 가로 11km의 큰 도시 같은 규모였다고 했다. 1만 명의 학승과 1500명의 교수가 함께한 불교학과 문화, 철학 연구의 중심지였다. 중국, 일본, 티베트, 몽고 등에서 온 학승들과 함께 한국에서 온 고승들도 어깨를 나란히 하며 구법하고 전법할 준비를 하였다.

안내자는 7세기에 그곳을 방문하고 오랫동안 법을 연구한 현장 법사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 주었다. 세계 최고의 지성이 모인 이곳에서 그분은 가장 빼어난 분이었다고 했다. 가장 많은 저술을 했고 가장 높은 법문을 남겼다고 했다. 중국, 한국, 일본을 아우르는 불교는 현장 법사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그분의 역경(譯經)에 의해 불교가 전해지고 가르쳐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역경이라기 보다 그분의 학식과 상상력에 의한 창교(創敎)에 가깝지 않았을까.

사리자를 기리는 탑이 웅장한 모습으로 한가운데 서 있었다. 붉은 벽돌로 된 거주구, 교실 등이 구석구석에 마련되어 있었다. 12세기 회교도들이 파괴하고 모든 스님들을 학살할 때까지 이곳은 오직 특정한 기준에 도달한 사람들에게만 입학이 허용되던 옛날 인도의 학문의 중심지였다.

안내자는 묘지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대부분의 묘지는 붉은 벽돌로 만든 사각형 구조였지만 신라 고승들의 무덤은 종 모양으로 되어 있었다. 목숨을 걸고 구법 여행을 마다하지 않은 우리의 선조들이 몇구의 무덤으로 자취를 남기고 있었다.

나란다(Nalanda)에서도 폐허만 보았다. 그러나 그것이 텅 빈 허망일 뿐일까. 그 구석구석에 그 공기 속에 조용조용히 움직이는 학승들의 경건한 발걸음이 가득 흐르고 있었다. “나는 이와 같이 들었습니다” “세존께서 이와 같이 설하셨다고 나는 들었습니다” 그들의 경전 만들고 읽는 소리가 귓전에서 흐르고 있었다.

저녁 7시 파트나(Patna)에 도착했다.

파트나는 기원전 3세기 불교 이념으로 통일 국가를 건설한 아쇼크(Ashok) 왕국의 수도였다. 현세의 부처님이라 일컬어 지는 마하트마 간디가 인도의 분열을 막기 위해 마지막 죽음에 이르는 단식을 한곳도 이곳이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기 전 라지기르(Rajgir)로부터 나란다(Nalanda)를 지나 마지막으로 이곳을 들르시고 바이살리로 가셔서 마지막 설법을 베푼 후 대중으로부터 떠나 열반길에 드신 곳이기도 했다.

가까운 거리에 또 다른 성지들이 기다리고 있지만 이번 여행은 여기까지다. 다음에 또 다른 일정으로 인도를 찾을 것이다. 오랜 역사 위에 앉아있는 그 유구한 문화가 몇 년 아니 몇 십년 뒤에 온다고 해서 변하지 않을 것이다.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쇼크(Askok) 호텔에 들어서니 세속이었다. 인도 사람들의 번잡과 함께 조계사의 성지 순례단이 로비를 요란스럽게 하고 있었다. 싱(Singh)에게 50불을 팁으로 주고 천천히 안전하게 운전해서 돌아가라고 합장했다. 그는 깊이 몸을 숙이고 조용히 떠나갔다. <‘인도기행’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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