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한종서 ‘현대조선 선봉’ 영전에···”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리”
[아시아엔=황성혁 황화상사 대표, 현대중공업 전무 역임] 한종서(韓鍾瑞) 형이 떠납니다. 오랫동안 지고 다니던 무겁고 고된 육신의 덫을 벗어 던지고 밝고 가벼운 영혼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종서 형의 떠남이 그래서 슬프지만은 않습니다. 따뜻하고 편안한 나라에 자리잡을 축복 받은 영혼을 생각하며 우리의 마음은 오히려 가볍습니다.
종서 형과 제가 사수(射手)와 조수(助手)로서 보낸 인생 행로는 1972년 가을 런던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새롭게 탄생한 조선소가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던 시절입니다. 런던지점은 그 시절 조선소의 심장이었습니다. 선박 영업과 기술 도입 업무를 종서 형은 맡고 있었습니다.
종서 형은 사수 저는 조수였습니다. 그 뒤 50여년을 저는 종서 형을 따라 다니는 조수였습니다. 일하는 데서 그랬을 뿐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도 종서 형은 저의 삶을 이끄는 사수였습니다.
하루 종일 일밖에 할 일이 없던 시절, 잠자는 동안에도 일을 꿈꾸던 시절, 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었습니다. 그나마 일의 결말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였습니다.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시간 속에서도 종서 형은 가끔 느닷없는 일탈로 사소한 행복을 만들곤 했습니다.
어느 일요일 아침 종서 형은 암청색 현대건설 점퍼를 걸치고 저와 함께 옥스포드 거리로 나섰습니다. 안개처럼 흩날리는 런던의 보슬비를 맞으며, 옥스포드 거리의 쇼윈도를 들여다보며, 쇼윈도 안에 진열된 최신 유행 상품보다 그 쇼윈도에 비친 우리들의 팔팔한 모습을 즐기며, 우리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유유히 거니는 잘 생긴 영국의 경찰관과 보조를 맞추었지요.
비 내리는 하이드파크(Hyde Park)는 얼마나 정겨웠던가요? 점심시간에 틈만 나면 나가던 하이드파크, 그날 우리는 옥스포드 거리가 끝나는 곳에서 하이드파크의 Speaker’s Corner로 들어섰지요. 횡설수설하는 연사 앞에 옹기종기 모여 섰던 청중의 한명이 되어 가끔 ‘옳소’를 외치기도 했습니다.
연단만 가져갔다면 단위에 올라 종서 형도 한마디 연설을 하지 않았을까 나는 지금도 믿고 있습니다.
점심시간마다 들르던 서펜타인(Serpentine) 호수는 비 오는 날도 아름다웠지요. 백조 먹으라고 빵 몇 조각 던지면 점잖은 백조는 사양을 하고 오리 떼들이 악을 쓰고 덤벼들어 먹어 치웠지요. 때로는 참새떼들의 잔치가 되었습니다.
종서 형 하면 비 오는 날의 산책을 늘 회상하게 됩니다. 여유 있고 올 곧은 종서 형의 몸가짐을 생각합니다.
종서 형은 미숙한 조수를 끌고 닥치는 대로 일을 해내었습니다. 철부지 조선소의 산적한 기술적인 문제들에 대한 해법의 시발점으로서 중심을 잡고 묵묵히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내었습니다. 참 큰일을 많이 했습니다.
스스로를 나타내지 않았지만 종서 형이 이룬 괄목할 만한 업적은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조선소의 제1호선 Atlantic Baron을 시작할 때의 어려움을 생각합니다. 선주의 기술 대표, 천하의 고집쟁이 Anastassopoulus(아나스)를 잠재우는 사람은 종서 형뿐이었습니다.
그는 떼를 썼지요. “모든 펌프는 청동으로 만드는 거야.” “스페어가 없는 기계는 기계가 아니야.” “내 말을 그르다고 하는 자는 엔지니어가 아니야.”
그는 그의 입에서 떨어진 말을 주워 담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것을 경전처럼 받아들이도록 애숭이 조선소의 모든 사람들에게 강요했습니다. 종서 형은 Anastassopoulus와 다투지 않았지요. 그저 미소를 지으며 건너다보기만 했습니다. 그는 떠들다 제풀에 못 이겨 종서 형의 타협안을 받아들이곤 했습니다. 마지막 사양서(仕樣書, Specification)는 Mark V였죠. 다섯번이나 수정한 뒤에 나온 사양서였습니다. 그것이 누더기가 되지 않고 조선소 기술의 교과서가 된 것은 종서 형의 아나스를 다스리는 인품 탓이었습니다.
조선소가 고용한 외국인 기술자들 또한 다루기 어려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영국 친구는 이런 말도 했지요. “너희들은 생각할 필요가 없어. 생각은 내가 할 테니 너희들은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그들의 비뚤어진 치기어린 결기도 결국 종서 형의 넓은 마음과 따뜻한 손으로 다스려졌지요. 열평형(Heat Balance)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메이커, 모든 기술자, 모든 선주 감독관들이 제각기 그들의 취향에 맞게 기관실의 Heat Balance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사공 많은 배가 산으로 가는 꼴이었지요. 그것도 결국 종서 형의 손이 쓰다듬고 가다듬어 가지런히 되었습니다.
제가 현대조선에 들어갔고 종서 형의 조수가 되었다는 말을 종서 형의 서울대 기계과 대학 동기인 최해복 형에게 했습니다. 해복 형은 감동하였습니다. 그리고 제 용기를 한껏 돋워주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종서가 거기 갔어? 그 회사가 복덩이를 잡았구먼. 그럼 현대조선은 되는 회사야. 그 친구는 무엇이든 제대로 되게 하는 재목이니까. 당신도 큰 행운을 잡았어. 종서를 도와 열심히 해봐. 좋은 일을 이루게 될 거야.”
조선소 시작할 때 정주영 회장의 막막한 심정을 누가 이해 할 수 있었을까요? 그분은 모든 결정을 혼자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의논할 사람도 참고할 문헌도 없었습니다. 오직 자신의 지혜와 판단과 결단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분 뒤에 종서 형이 있었습니다. 조용하고 느긋하며 영어에 통달하고 설득력 있는 종서 형이 있었습니다.
사리에 밝고 사심 없는 종서 형이 곁에 있어 정주영 회장의 마음을 안온하게 했던 것입니다. 평소에 그런 감정을 나타내지 않던 정 회장께서 70년대 중반 종서 형이 허리 디스크 때문에 얼마간 입원을 해야 한다는 진단이 나왔을 때 보이던 당혹한 모습을 지금도 저는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70년대 후반 종서 형은 “조선은 나발 아키텍트(Naval Architech)가 해야지” 하며 산업 플랜트 쪽으로 옮겨갔습니다. 현대중공업의 또 하나의 장을 열며 플랜트 사업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선박 영업에서 많이 부대꼈습니다.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종서 형을 생각하였습니다.
‘종서 형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라고 고민하며 살았습니다. 그러한 생각은 저를 절망으로부터 붙들어 주었고 촐싹거림으로부터 저를 통제하였습니다.
1989년 말 제가 회사에 사표를 내자 종서 형은 탄식을 했지요. “탐욕 때문에 재목이 기리빠시가 되는구나.” 그러나 저는 옛날 사수를 잘 모신 덕택에 지금도 기리빠시는 면하고 있고, 결코 기리빠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종서 형이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며, 떠날 때가 가까워 졌다는 생각이 내게도 실감으로 다가옵니다. 결국 떠나는구나. 떠나야 하는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떠나면 또 만날까? 그래 만나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날까? 이 고단한 육신 털어버리고 영혼이 맑고 가벼워질 때 우리 복사꽃 만발한 은하수가에서 만날까?
복사꽃이 안개비처럼 날리는 은하수 해변을 유유히 거닐며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 한 곡조 뽑아 볼까? 으르렁거리는 천둥의 연설을 들으며 천둥과 담론하다가 작은 연단 옆에 붙여 놓고 올라서서 우리의 우주론도 한바탕 늘어놓아 볼까? 무지개 걸리면 미끄럼 타듯 올라 앉아 성좌와 성운 사이를 부드럽게 넘나들어 볼까?
편히 쉬십시요. 종서 형, Adieu. Aurevoi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