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짝사랑 마리 로랑상의 ‘색채의 황홀전’ 예술의 전당서 만나다

[아시아엔=황성혁 황화상사 대표, 현대중공업 전무 역임] 작년 크리스마스 전날 손녀들과 함께 예술의전당을 찾았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국립발레단의 ‘호두까기 인형’을 관람하는 것이 손녀들과의 연례행사가 되었다. 그런데 작년의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행사가 예술의전당에서 있었다.

마리 로랑상의 전시회가 ‘색채의 황홀’이란 이름으로 열린 것이다. 마리 로랑상은 오랫동안 내 짝사랑의 대상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보고 싶은 사람이 누구냐고 하면 서슴지 않고 대답할 이름이었지만 나의 깊은 상사병은 아랑곳 않고 그녀는 그녀의 제대로 된 모습을 내게 보여주지 않았다. 나는 해외출장 때마다 세계 곳곳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고작 ‘동시대인 전’ 같은 곳에서 전혀 다른 성격의 그림들 한 구석에 한두 점 그녀의 색깔과 구도를 고집하며 생뚱맞게 자리잡고 있거나, 외국 대기업의 회장실 입구에 달랑 한 점 휘황한 조명 속에 잘난 척 앉아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녀 자신의 전시회나 그녀 자신의 그림을 모아 놓은 화랑을 만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변변한 화집 한 권 구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우리나라 예술의전당에서 작년 12월9일 시작해 오는 3월11일까지 유화 69점을 포함한 총 160점의 작품을 모아 전시한다는 것이다. 내 짝사랑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호두까기 인형’ 시작 서너 시간 전에 그림그리기 좋아하는 손녀들을 데리고 전시관에 가서 그리웠던 그녀와 만남을 마음껏 향유했다.

그녀는 1883년 태어나 1956년 떠났으니 유럽 사상 최대의 재앙인 세계 1, 2차대전을 겪으며 전쟁이 준 삶의 무게와 슬픔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다. 그 시대는 모든 것이 재편되는 시기였다. 미술계에서도 피카소 등이 이끄는 입체파와 마티스 등이 이끄는 야수파가 새로운 흐름을 이끌고 있었다.

피카소 등이 자연의 형태를 파괴해 시각적인 것보다 느껴지는 사물의 형체를 탐구하는 편인가 하면, 마티스 등은 풍경의 모든 조화로운 색조를 무시하고 튜브에서 짜낸 원색으로 캔버스를 덮어 기존의 색채 개념을 무시하였다.

그들이 모이는 곳을 ‘세탁선’이라 불렀다. 몽마르트 언덕에 있는 피카소가 살던 집이었다. 집값이 비싸 파리 시내에서는 살지 못하고 몽마르트 언덕 기슭 헐어빠진 집에 피카소가 살기 시작했고 그곳으로 전위예술가들이 자기집처럼 드나들었던 것이다. ‘세탁선’이라는 이름도 “세느강에서 빨래터로 쓰이는 기울어진 배를 연상시킨다”며 시인 막스 자코보가 붙인 것이다. 기고만장하고 안하무인이며 거친 그 사나이들의 집단에 마리 로랑상은 단 명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범접하지 못할 기품을 지니고 거기서 예술가로서의 생애를 시작했다. 마티스의 보살핌을 받았고 피카소는 현대시의 시작을 알린 기욤 아폴리네르를 마리에게 소개하였다. “어제 자네 부인과 만났어. 자네는 아직 그녀를 모르지만 말이야.” 그들은 일생을 통해 만나고 헤어지면서 정신적으로 끊을 수 없는 끈으로 연결되었다.

스물네살에 아폴리네르를 만나 스물아홉에 연애 관계가 끝난다. 아폴리네르는 마리에게 바치는 많은 시를 썼고 특히 이별의 아픔을 새긴 ‘미라보다리’는 지금도 널리 애송되고 있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이 흐르고
우리들의 사랑도 흘러간다.
그러나 괴로움에 이어서 오는 기쁨을
나는 또한 기억하고 있나니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손에 손을 잡고서 얼굴을 마주 보자.
우리들의 팔 밑으로
미끄러운 물결의 영원한 눈길이 지나갈 때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흐르는 강물처럼 사랑은 흘러간다.
사랑은 흘러간다. 삶이 느리듯 희망이 강렬하듯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날이 가고 세월이 지나면
가버린 시간도 사랑도 돌아오지 않고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만 흐른다.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그녀의 일생 동안 많은 일들이 벌어졌고 그녀의 그림에도 그런 역사는 투영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그림은 편의상 시기적으로 구분하여 청춘시대, 망명시대, 열정시대, 성숙의 시대로 나눈다.

‘청춘시대’는 ‘세탁선’에 드나들며 입체파, 야수파들과의 교류, 아폴리네르와의 사랑이 꽃피던 시절이었다. 그녀의 그림에는 많은 대가들의 영향을 조금씩 담고 있다. 청색을 많이 써서 언뜻 보면 피카소의 ‘청색시대’를 닮은 것 아닌가 하는 인상도 준다. 로댕은 그녀를 ‘야수파 소녀’, 장 곡토는 ‘야수파와 입체파 사이에 덫에 걸린 불쌍한 암사슴’이라 부르며 그녀의 존재가 인정되기 시작한다. 아폴리네르와의 사랑은 5년만에 끊겼으나 그와의 교신은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그녀는 야수파와 입체파를 존경했지만 거기서 벗어난다. 1942년 출판된 그녀의 산문집 <밤의 수첩>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입체파가 되지 않은 것은 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탐구에는 열정을 불태우는 것이 있었다.”

‘망명시대’는 그녀의 가장 암울한 시기였다. 1914년 6월 결혼 직후 1차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아폴리네르를 떠난 뒤 그녀는 독일인 오토 본 뷔첸 남작과 결혼한다. 그런데 그 결혼 직후 1차대전이 터지고 독일인과 결혼한 마리는 국적 없는 신세가 된다. 프랑스에서도 살 수가 없고 독일로 갈 수도 없었다. 그 부부는 신혼여행 도중 중립국인 스페인으로 망명하여 여러 곳을 떠돌아다닌다. 파리에 있던 자산은 몰수되고 그녀의 피어오르기 시작한 명성도 물거품이 되었다. 그녀의 자화상이나 다른 사람들의 초상화에 나타나는 좀 생뚱맞고 거친 표정은 그때의 고독감과 막막함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전쟁이 끝나고 그들의 결혼도 끝난다.

망명기간 동안 그녀는 온갖 괴로움을 맛본다. 그 중 그녀를 괴롭힌 것이 ‘잊혀짐’이었다. 모든 친구들로부터, 세상으로부터 잊혀졌다는 강박관념이었다. 바르셀로나에서 발표한 ‘진정제’라는 시는 그녀의 고민하는 모습 그것이었다.

지루하다기보다 슬퍼요
슬프기보다 불행해요
불행하기보다 병들었어요
병들었다기보다 버림받았어요
버림받았다기보다 나 홀로
나 홀로라기보다 쫓겨났어요
쫓겨났다기보다 죽어 있어요
죽었다기보다 잊혀졌어요.

죽는 것보다 더 괴로운 잊혀짐을 극복하며 그녀는 성숙한다. 그녀만의 독창적 화풍이 서서히 정착해 간다. 자화상, 말, 사슴, 새 등이 섬세한 회색으로 서서히 분홍·청색·노랑 색조와 어울어지기 시작했다.

열정시대는 그녀가 이혼한 40대에 시작된다. 이혼 후 그녀가 사랑했던 아름다운 파리로 돌아온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운 여인상에서 우울한 표정을 배제하고 우아하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색조와 세련된 꿈을 꾸는 듯한 모습을 강조한다. 전쟁이 끝나고 승전국의 도취감으로 활기 가득한 파리는 마리의 우아한 여성상에 압도적인 인기를 몰아준다. 경제적으로 안정되었다. 마흔한 살(1924년)에는 러시아의 발레뤼스를 위해 무대의상과 무대장치 디자인에 도전해서 대성공을 거둔다.

장곡토 등과의 교류를 통해 문학작품에 삽화도 그려넣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하였다. 코코 샤넬이 초상화를 주문했다. 샤넬은 “닮지 않았으니 다시 그려줘” 라며 퇴짜를 놓았다. 마리는 거절했다. “샤넬은 어차피 오베르쥬 출신의 시골뜨기야. 파리의 예술을 몰라. 나는 절대 다시 그리지 않을 거야.” 이 시기 그녀의 그림은 그저 아름답다. 자화상도 초상화도 사슴도 말도 관능적이고 나른한 여성적 세계를 마음껏 표현해 낸 시절이었다. 그녀는 수상록 <밤의 수첩>에서 “파란색을 좋아하는 사람은 단연코 고상한 사람들”이라고 강조 했다.

그녀는 고상한 청색, 핑크 그리고 회색이 조화되어 따를 수 없는 우아함을 창조하고 있다.

성숙의 시대는 그녀의 50대 이후의 활동을 의미한다. 마리의 인물화는 더욱 화려해지고 관능적이 된다. 1939년 시작된 2차대전은 독일군을 파리로 불러온다. 그러나 그녀는 떠나지 않고 파리에 남는다. 궁핍한 생활 속 어디에도 궁핍한 내색을 않는 우아하고 포동포동한 소녀상은 전쟁의 비참함을 덮어 감추고도 남았다. 영국에서 출판된 영문판 <춘희>의 삽화 등 수채화 12점을 남겼다.

그녀는 1956년 7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여성으로서 짊어질 수밖에 없는 비애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오히려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성상으로 자신을 승화시킨 생애였다. 마리의 자화상과 인물화를 시대별로 보는 것도 의미있다.

스물한살(1904년)에 그린 자화상은 그녀 얼굴의 모든 약점만 모아 오종총하게 그려 놓았다. 가난하던 청춘시대의 불만과 실망이 가득 담긴 표정이다. 그녀 스스로 못생겼다고 하던 시절이다. 그러나 스물다섯(1908년)에 그린 그녀의 얼굴은 훨씬 훤칠하고 자신에 차 있다. 피카소 같은가 하면 마티스 같기도 하다. 세탁선에서 받은 영향이 한껏 묻어나 있다. 1913년 그린 ‘파란색 차양에 검은색 리본의 모자를 쓴 여인’은 그녀의 망명 시절 그녀를 괴롭히던 ‘잊혀졌다는 두려움’을 가득 담고 있다.

청색조의 옷에 그어 놓은 격자무늬는 그녀를 가두어 둔 창살로 이해되고 있다. 파리로 돌아 온 마리는 재능을 열정적으로 발산한다. 1924년의 자화상과 1927년의 모자를 쓴 자화상은 그녀가 이룬 몽환적 여성상의 완성이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그녀만의 세계가 태어난 것이다. 1953년에 그린 ‘세명의 젊은 여인들’은 창작의 결정판이다. 일본의 칸바라 타이는 처음 그림을 보고 “그것은 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인들과 꼭 같다”고 감탄하였다. 성숙기의 그녀는 그림뿐만 아니라 인생 전체에 완숙한 향기를 남긴다.

유언에 따라 그녀는 하얀 드레스를 입고 붉은 장미를 손에 들고 평생 모아 놓은 연인 아폴리네르의 편지를 품에 안은 채 매장되었다. 1979년 마리로랑상재단이 소장하던 마리의 작품들이 경매에 붙여졌다. 다행히 작품들은 여러 손으로 흩어지지 않고 파리미술의 섬세한 감정과 덧없는 마음을 깊이 이해하고, 마리와 정취가 통하는 일본 미술인들이 많이 사들였다.

1983년 나가노현 타테시나에 마리로랑상미술관이 개관했다. 이번 전시회는 일본측의 협조로 이루어진 것이다. 전시회는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내게 주었다. 굶주렸던 사람처럼 마리 로랑상을 포식하였다. 이제 천천히 반추하며 마리 로랑상을 생각해 보아야겠다. 그럴 가치가 있는 예술이며 인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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