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혁의 나일강기행] ③ “순하고 친근한 표정의 이집트 석상”

*’황성혁의 조선(造船)삼국지’와 ‘인도기행’, ‘조선사(造船史)’를 연재했던 황화상사 황성혁 대표이사가 이번에는 이집트 ‘나일강’ 여행기를 연재합니다. 이집트를 남북으로 흘러 내리며 찬란한 문명의 중심지가 되었던 나일강은 20년 전 어떤 모습이었는지, 아시아엔(The AsiaN)에서 함께 여행을 떠나 보시기 바랍니다.

1994년 6월12일(일)

카이로 박물관에서

아침9시에 늦으막한 아침을 먹고 천천히 걸어 Tahrir 다리를 지나 Tahrir 광장 한 모퉁이에 있는 Cairo Museum으로 갔다. 이층의 투탄카몬 전시관은 아껴두고 우선 아래층의 유물관으로 갔다. 미이라 관은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카이로 박물관

일층 전시관의 첫인상은 너무 작다는 것이었다. 고대 이집트로부터 로마시대로 면면히 이어져 오던 인류초기의 가장 풍요롭고 지혜로운 시대의 방대한 유산을 담기에 너무 작고 초라하다는 인상이었다. 대영박물관, 루불박물관 등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전시관은 협소했고 전시품은 초라했고 내부정리도 부실했다.

그러나 이집트 정부의 적극적인 투자로 유물들이 속속 늘어나고 있고 정리도 나아지고 있으며, 박물관도 확장할 계획이고, 또 그렇게 함으로서 통제가 불가능하던 문화유산의 국외유출에 제동이 걸리고 있다고 하니 다행스런 일이었다. 우리는 구석구석을 뒤져 작은 설명문을 빼지 않고 읽으며 돌아다녔다. 근래 드물게 한가한 시간이었다. 석상들의 표정들이 좋았다. 신들의 것이라기 보다 인간의 얼굴들이었다. 하나같이 순하고 친근한 인상이었다.

그리고 그 단단한 돌을 다룬 솜씨 특히 마감 손질은 완벽했다. 마치 부드러운 밀가루 반죽을 압착기에 넣어 짜낸 듯 표면이 매끄럽고 흠집이 없었다. 사막의 메마른 기후가 소중한 유물들을 풍화나 퇴색으로부터 보호하는데 큰 몫을 했던 것 같다. 전시관이 적다고 했지만 그것은 방대한 역사에 비해 작다는 것이지 큰 박물관이었다. 왕조에 따라 변화해 가는 인생에 대한 평가나 삶에 대한 집념이 모두 다른 형태로 표현되고 있었다.

카이로 박물관. 투젠카몬 관 앞에서

우리는 마치 누구를 깜짝 놀래주기 할 듯이 살금살금 소리내지 않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투텐카몬 왕과의 만남을 위해서였다. 18 왕조의 마지막 왕이라고 했다. 재위 9년 만에 사망했는데 그때 스무살이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니 삶을 제대로 향유하지도 못했고 나라를 다스릴 능력도 갖출 수 없는 연륜이었다. 전시관으로 들어서자 황금색과 아라베스크의 밝은 빛깔이 눈을 가득 채웠다. 어린 나이의 죽음 탓일까. 그 빛깔이 밝은 만큼 그 방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명처럼 울리고 있는 음악은 울음소리 같았다. 숨을 죽이고 흐느끼는 울음 같았다.

카이로 박문관. 투탄카몬 왕좌

기원전 14세기 중반에 살았던 아름다운 어린 왕은 황금 마스크로, 아라베스크로 된 세 겹 관으로, 왕비와 앉던 황금의자로, 궁정에 살던 시녀들의 조각으로, 내장을 담았다는 아라베스크 병으로 남아 있었다. 그들은 마치 속에 전등을 지닌 것처럼 밝고 따뜻하게 빛났다. 오전의 거의 모든 시간을 투텐카몬 왕과 함께 지냈다. 진실로 슬프면 아름다운 것일까.

카이로 박물관. 아라베스크 병

이집트 박물관에서 나오니 오후 한시가 가까웠다. 놀랍게도 박물관 앞에 한국음식점이 있었다. 해외여행 중 현지음식을 잘 먹는 편이어서, 또 현지음식 먹는 것도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애써 한국음식점을 찾아 다니지 않았다. 그러나 집 떠난 지 일주일이 지났으니 김치 생각도 났었다. 두말 않고 음식점으로 들어섰다. 갈비탕을 시켜놓고 김치부터 맛을 보았다. 맛이 괜찮았다. 아내와 물잔을 들어 부딪쳤다. 지금까지의 무사했던 여행에 감사하며 내일부터 있을 Nile Cruise가 행복한 것이 되기를 기원했다. 음식 나르던 여자아이들이 우리가 물잔으로 건배하는 것을 보고는 키득거렸다.

식당에서 나와 다시 Tahrir 다리를 건넜다. Cairo Tower에 올라가 볼 생각이었다. 지나가는데 어제 그 아우가 또 불러 세웠다. “형님.” 그 친구와의 대화는 별 거부감이 없었다. 서로 마음이 잘 통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친구와의 대화는 응해주고 싶었다. 또 가방에서 비슷한 물건들을 주섬주섬 꺼내더니 하나 사 달라고 했다. 그런데 물건을 사면 불필요한 이야기가 연달아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우님 것을 꼭 사 주고 싶지만 내가 지금 돈을 가진 것이 없어.” 자꾸 치근거리길래 약간 야단을 쳐 주었다. “형님이 말하면 알아 들어야지. 다음에 올 때 내가 좀 사 준다고 했잖아.” 그는 비실거리며 멀어져 갔다.

우리는 Gezira 섬에 있는 Cairo Tower에 올랐다. 1951년 착공해서 1961년에 완성했다는 초 현대시설이었다. 화강암으로 만든 격자무늬 원통 속에 기둥이 들어앉은 187m 높이의 탑이었다. 탑 아래로 나일강이 넓게 흐르고 여러 척의 유람선이 정박해 있었다. 카이로의 옛 시가지와 현대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올 뿐 아니라 남쪽으로는 기자의 피라미드가 아스라이 먼지 속인지 아지랑이 속인지 잠겨 있었다. 요즈음은 도시마다 전망대를 만든다. 인간은 도시를 만들고 그것을 최고의 경지로 완성하는 즐거움을 누릴 뿐 아니라 자기가 이룬 성취를 위에서 내려다 보며 향유하고자 하는 욕망도 가졌다. 그 끝없는 야망.

카이로 타워

호텔로 돌아와 좀 앉아 있다가 다시 나섰다. 일곱 시가 넘었지만 해가 남아 있었고 나일강은 아무리 보아도 좋았다. 나일강 크루즈를 시작하기 전 갈비탕을 한 그릇 더 먹어 두자는 생각이었다. Tahrir 다리를 건너는데, “형님” 하고 어느새 그 친구가 다가왔다. 그는 조금 진지해져 있었다.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뒤 한달 뒤 결혼을 하기로 되어 형님께 알린다고 했다. 나는 축하한다고 신부는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같은 고향 출신의 여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대화가 조금씩 틀어지기 시작했다.

아우가 결혼하는데 형님이 좀 도와줘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간 뒤 너희들 가문에 가보가 될만한 훌륭한 한국의 선물을 결혼 기념으로 보내 주겠다고 했다. 그는 계속 돈을 좀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딱 잡아떼었다. 지금까지 이야기 해 왔지만 나는 현금은 거의 바닥이 났고 지금 카이로에서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다고 했다. 아주 괴상한 대화였지만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그의 말에 일일이 응대해 주었다. 그가 한가지 제안을 하였다.

“형님, 우리 형제들이 이 근처에 가게를 내고 있는데 우리 형들 좀 만나주지 않겠소.” 나는 무슨 배짱이었던지 그러라고 했다. 한 오분 쯤 걸어가서 무역회사 간판을 단 조그만 사무실로 들어섰다. 삼십대 중반의 사내들 서너명이 우리 부부를 멀거니 건너다 보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우는 그의 형들이라고 소개하고 앉으라고 했다. 펩시콜라를 가져와서 우리 앞에 내려 놓았다. “우리는 곧 저녁을 먹을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마시지 않겠다.” 나는 단호히 거절했다.

아우는 내게 형들에게 내 이야기를 해 달라고 했다. 나는 좀 촌스럽게 그러나 굉장히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이 사람을 안지는 얼마 되지 않지만 내 아우로 삼기로 했다. 왜냐하면 나는 이집트 사람들을 좋아할 많은 이유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아우가 곧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정말 축하한다. 지금 현금이 없어 현금으로 축하는 할 수 없지만 내가 귀국한 뒤 아우가 평생 가보로 삼을만한 선물을 보내기로 했다. 당신들이 내 아우의 형제들이라니 나는 당신들도 내 형제로 생각하겠다.” 나는 그들이 이야기할 틈을 주지 않고 천천히 오래 말을 끌었다. 내 이야기가 길어지자 내 건너편에 앉았던 친구가 눈짓을 했다. 그러자 그 아우가 내게 다가왔다.

“형님. 알았으니 이제 나가셔도 됩니다.” 나는 모두에게 일일이 악수를 하고 그 방을 나왔다. 밖은 어두워져 있었다. 아내가 말했다. “아까 이상하지 않았어?” 내 등은 무더위 속에서도 차가운 땀으로 축축히 젖어 있었다. 그 방에 들어서면서 그때 신문에 심심치 않게 나던 이집트에서의 납치사건을 생각했었다. 많은 독일 사람들이 납치되었고 상당한 고초를 겪었다고 보도되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않고 축축히 땀에 젖은 아내의 손을 꽉 쥐고 한국식당으로 급히 걸음을 옮겼다. 곰탕이 나오자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을 돌렸다.

“우리 그 며느리 후보자들 말이야, 오늘 어떻게들 지냈을까.” 그제서야 아내의 얼굴에 약간의 화색이 돌며 맞장구를 쳤다. “참 예쁘고 활달하고 참한 며느리감들이었는데.” 나는 이집트 사람들에 대한 나의 확고한 호감을 훼손시키고 싶지 않았다. 아내에게도 이집트에 대한 호감을 고스란히 남기고 싶었다. 아내도 곧 내 마음을 받아들였다. 돌아오는 길에 같은 다리를 지나왔지만 아우는 없었다. 침착하려고 노력을 하였지만 발은 계속 허공을 헛짚는 것 같았다.

우리의 결혼 28주년 밤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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