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혁의 造船삼국지] LNG 운반선, ‘그 아름다운 배’
원래 선박 시장이라는 곳이 철딱서니 없는 배들과 그들을 다루는 평생 철들지 않을 사람들이 뒤엉켜 사는 곳이다. 조금 시황이 좋다 하면 너나 할 것 없이 뛰어들어서는 하루아침에 시장을 부풀려 놓는다. 거기에 은행들까지 끼어든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거대한 돈을 투자할 수 있는 대상으로 선박만한 것이 없다. 액수도 크고 긴 시간 동안 안정된 수입이 확보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도 철딱서니 없기는 한가지다. 전통적인 해운회사뿐만 아니라 투기꾼들에게까지 돈을 빌려 주어 시장에 선박이 넘쳐나게 만들고, 필요 이상으로 지은 배들은 제대로 된 화물을 찾지 못해 애물단지로 전락하게 된다. 결국 배의 소유자는 파산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그것은 선박회사만의 파산으로 끝나지 않고 은행 자신의 재정상태까지 파탄을 내는 것이다.
흥청망청 선박시장, 열병의 끝에 오다
2011년이 그랬다. 2002년부터 흥청거리기 시작한 시장은 2008년 중반까지 흥청망청이었다. 모두 이 잔치가 너무 지나치다고, 너무 오래 계속되었다고 말은 하면서도 그 호황이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배에 돈을 쏟아 부었다. 어마어마한 양의 선박 건조 계약이 이루어졌다.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나 장래 해운시장의 수지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있는대로 돈을 긁어 모아 조선소로 달려갔다.
마침내 그 열병의 끝이 왔다. 하루 아침이었다. 표면적으로 2008년 여름 리먼 브라더스 은행의 파산이 그 시작이라고는 했으나 그것은 오래 전부터 예비되어 왔던 일이었다. 모든 것이 벼랑으로 떨어졌다. 넘쳐나던 돈들이 사라졌고, 계약된 선박을 위해 지불해야 할 돈이 준비되지 않은 선주는 계약을 취소했고, 은행에 제때 돈을 갚을 수 없는 선주는 파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형회사의 파산과 관계된 은행은 그 자신이 파산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의 모든 돈이 배를 짓기 위해 존재하는 것같던 분위기가 하루 아침에 바뀌어 선박은 애물 단지가 되었다. 조선소는 최고의 호황으로부터 하루 아침에 최악의 불황으로 내던져졌다. 선박 주문이 끊어진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받아놓은 주문까지 취소하겠다는 데는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전 세계의 조선소들이 문을 닫을 수 없어, 새로운 주문을 받아보려고 현금을 가진 선주들에게 온갖 아양을 다 떨었고, 계약취소를 막기 위해 모든 촉각을 곤두세웠다.
자연스럽게 2007년에 비해 2011년의 전세계 선박 주문량은 1/4 이하의 수준으로 떨어졌다. 일본은 더 이상 나쁠 수 없는 10% 미만으로 떨어졌고, 중국도 아무리 값을 내려도 배를 짓겠다는 선주를 잡기가 어려웠다. 조선경기의 불황과 호황은 주기적으로 오는 것이고 어느 기간 동안의 불황을 견디면 좋은 세상이 온다는 것이 보통의 조선시장의 패턴이었다.
그러나 이번은 호황이 너무 길었고 짓고 있는 배들이 너무 많았다. 선박의 수급에 있어서 공급과잉이 상당 기간 갈 것 같았다. 따라서 조선소의 어려움도 가까운 시일 안에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은행들은 모든 선박 금융업무를 중단했고 중국의 수많은 조선소와 일본의 유수한 조선소 그리고 한국의 중소 조선소들도 문을 닫지 않을 수 없는 최악의 상황으로 몰리고 있었다.
불황에도 준비한 자에게 기회는 반드시 온다
그런데 철딱서니 없는 동네 한가운데 그 혼돈된 상황에서도 눈을 똑바로 뜨고 시장을 분석하며 다가오는 새 세상을 준비한 총명한 선박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때를 기다린 철이 든 사람들도 있었다. LNG선, 유전 시추선, 해양 구조물, 초대형 콘테이너선들이 그들이었다. 갈팡질팡하는 시장판에서 모두들 싸구려 벌크선이나 유조선을 잡으려고 아우성 치는 동안 한발 물러서서, 가장 비싸고 이익이 많이 나는 선박을 개발하고 수요를 창출하고 경쟁력을 축척해서 독식해 버린 사람들이 있었다. 한국 대형 조선소 들이었다.
작년 대부분 조선소들이 일용할 단순한 양식을 걱정하고 있는 동안, 한국의 주요 조선소들은 가장 자양분이 많은 LNG 관련 선박 48척, 드릴쉽 26척, 초대형 콘테이너 운반선 30여척 등을 독식하여 더 이상 주문 받을 여력이 없을 정도로 포식을 한 것이다. 다른 나라의 모든 조선소들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멀거니 건너다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참 놀라운 일이었다.
그 중에도 액화 천연가스 운반선 (LNG Carrier)은 감동적이었다. 천연가스가 연료로서 각광을 받는 것은 그것의 깨끗함 때문이다. 태워도 탄산가스가 나오지 않고, 관리하는 동안 먼지를 일으키지 않으며 방사능으로부터 자유로왔다. 그를 수송하는 과정에서의 해상오염 걱정도 없었다. 적극적으로 개발된 지 오래지 않아 매장량도 풍부했다. 천연가스가 한동안 지상의 연료 문제에 대한 해답일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수송방법이었다. 기체상태로 옮기기 위해서는 파이프라인이 유일한 방법인데 장거리 수송에 문제가 있을 뿐 아니라 인위적으로 파이프가 파손될 우려도 많았다. 고전적인 수송 수단인 선박을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면 부피를 줄여야 했다. 액화시키는 방법이 최선이었다.
천연가스의 액화점은 절대 온도에 가까운 영하 160도이다. 액화되면 부피는 600분의 1로 줄어들게 되었다. 충분히 선박수송의 대상이 되었다. 액화천연가스를 운반하기 위해서는 최첨단 기술이 동원되었다. 초저온을 견디는 특수강으로 화물창이 만들어지고 그 거대한 화물창은 항상 최저온이 유지되도록 첨단의 보온장치를 갖게 되었다.
액화천연가스 운반선은 아름답다. 화물창은 스테인레스 같은 초저온에 견디는 철판으로만들어져 공간전체가 거울로 뒤덮인 것같이 깨끗하다. 스테인레스 철판의 용접은 보통 철판의 용접과 다르다. 작업장은 마치 최고급 호텔방과 같은 공기정화 장치를 갖춰야 한다. 습도와 온도가 조절되어야 하고, 미세먼지까지 제거되어야 한다. 먼지가 용접부위에 있으면 용접 불똥이 튀어 용접상태가 불완전해지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작업하는 사람은 모두 단정한 복장을 하고 작업화 위에 덧신을 신어 스스로 가장 깨끗한 작업 환경을 유지해야 한다. 그런 환경에서 이 아름다운 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80년대초부터 LNG Carrier 시장에 진입하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우선 70년대에 개발된 노르웨이 Moss Rosenberg의 둥근 구형(Spherical Type) 저장시설에 대한 기술사용권을 얻어야 했다. 그것조차 쉽지 않았다. 우리가 엄청난 사용료를 내겠다면서 사용권을 요청했으나 Moss Rosenberg는 쉽게 허용치 않았다. “일본이 70년대부터 기술 사용료를 내면서 LNG Carrier 건조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때까지 한 건도 건조를 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일본에 대한 사업 도의상 다른 경쟁사에 특허 사용권을 준다는 것은 고려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별 짓을 다했다. 그들과의 경쟁관계에 있는 France의 Membrane 타입으로 배를 짓겠다고 위협도 했다. 끈질긴 협상 끝에 80년대초 기술사용권을 얻었다.
?LNG 운반선 수주 막전 막후
그러나 시장에 진입하기까지 멀고 험한 길이 남아 있었다. 조선소에서는 수주 성공여부에 관계없이 LNG CARRIER팀을 가동했다. 화물창의 모형을 만들어 끊임없이 제작시험을 반복했다. 그리하여 LNG선에 대한 세계적 권위를 가진 전문가들을 길러내었다. 영업팀은 전세계 액화 천연가스를 취급 관리하는 주요 에너지회사를 찾아 다녔다. 시험제작된 모형의 사진과 제조과정 등의 자료를 가지고 소개 및 발표회를 가졌다.
세계의 석유 에너지 회사의 우리 기술적 능력에 대한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결론은 참담했다. “세계의 천연가스의 대부분은 일본이 사간다. 따라서 LNG Carrier의 건조에 관한 발언권은 그들이 갖고 있다. 따라서 우리를 설득하기보다 일본을 설득하라”는 것이었다. 모든 것은 일본이라는 벽에 막혀 있었다.
그때 가장 시급한 프로젝트는 호주 북쪽 해안에서 개발되는 가스전이었다. 우리는 개발권자이며 LNG의 수송권을 가진 SHELL사와는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선박도 여러 척 지었고 시추선에 관한 기술정보도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LNG선에 관한 한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한결같이 가스의 최종 수입자인 일본이 모든 결정권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입찰 날짜는 다가오고 결국 일본과 맞부딪쳐 보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일본에서 LNG 운반선을 짓는데 선두에 서있던 가와사키중공업에 접근하기로 결심했다. 은퇴시기가 가까웠던 영업 총책임자인 가메타니 전무에게 매달렸다. 그는 나를 좋아했고 나도 그를 깊이 존경하고 있었다. 특히 그는 한국 올 때마다 나와 저녁을 같이 했고 만찬 끝의 여흥에서는 내게 아리랑을 부르도록 요청했었다. 김동진의 ‘신아리랑’은 그가 꼭 듣고 가야 할 레퍼토리였다.
“싸릿문 여잡고 기다리는가,
기러긴 달밤을 줄지어 간다.
모란 꽃 필적에 정다웁게 만난 이,
흰 국화 시들 듯 시들어도 안 오네”
그 여운이 깊고 이름다운 이 노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이기도 했다. ?나는 매어달리듯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의 어조는 사뭇 협박조였다. “이번 SHELL의 입찰에는 가와사키중공업이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알고 있다. 우리도 끼워주었으면 좋겠다. 이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기 보다 귀사를 위한 면도 있다. LNG 운반선 시장은 우리가 꼭 진입해야 할 시장이고 우리는 물불 가리지 않고 참여하겠다. 특히 우리는 이 프로젝트를 따기 위해 상당한 출혈을 할 용의가 있다. 우리가 아주 싼 값으로 입찰에 응하면 귀사의 가격에도 결국 큰 손상이 오지 않겠는가. 4척 발주 분량 중 1척만 우리에게 양보해 주면 우리는 귀사가 이끄는 대로 가격 및 납기 등 모든 조건을 따르겠다.”
그는 가만히 듣고만 있더니 그 특유의 조용하고 설득력 있는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미스터 황. 당신의 생각은 충분히 알았고 또 고려할 가치가 충분하다는 것도 인정한다. 며칠 동안 내부 의논을 거쳐 우리 쪽 의견을 알려주겠으니 기다려달라.” 그의 완곡한 거부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다렸다. 이틀 후 그의 회답은 기대를 벗어나지는 않았다.
“미스터 황, 이 프로젝트와 관련해 당신의 깊은 뜻을 받아들이도록 여러 모로 검토하고 여러 부서를 설득해 보았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우리 회사만의 것이 아니라 일본의 국가적인 프로젝트이므로 다른 나라 기업을 끼워 넣을 틈이 전혀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미안하다. 이해해 주기 바란다.”
새로운 강자 중국을 어떻게 넘을 것인가
LNG 운반선은 한국의 가스공사가 가스의 수입을 본격화하면서 시작될 수 있었다. 70년대 후반 80년대 중반까지 세계의 조선산업을 이끌어 가던 선각자들은 지금 세계 조선시장을 이끌고 있는 한국 조선 공업의 모습을 보고 무엇이라고 할까.
가메타니씨는 돌아가셨다. 그분은 이 세상을 내려다보며 무엇이라고 할까. 아마 당연히 이루어져야 할 일이 이루어졌다고 할 것이다. 시장의 어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준비를 한 사람들, 문전박대를 받으면서도 이를 악 물고 덤벼들었던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일본은 상선이나 특수선 어디서도 경쟁 대상으로 고려되고 있지 않다. 중국은 LNG 수송시장에 그 거대한 발걸음을 들여 놓았다. 그들의 엄청난 국가적 수요와 국력은 선박건조 시장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거대한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나는 세계 에너지시장을 이끌고 있는 친구들에게 묻고는 한다.
“언제쯤 당신들은 중국에 LNG Carrier를 발주할 것인가.” 그들의 대답은 한결같다.
“글쎄 가까운 시일 안에는 어렵지 않겠어. 단지 그들 정부가 화물, 운임, 선박 성능까지 보장한다면 또 모르지.”
글쎄 언제쯤일까. 몇 년 뒤일까. 몇 십 년 뒤일까. 그들이 국력을 뛰어넘어 자신의 힘으로 다가설 시기는 글쎄 언제쯤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