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혁의 造船삼국지] ‘한국’, ‘한국인’을 위한 해명
몇 년 전 홍콩에서였다. 당시 나는 홍콩 3대 해운회사 가운데 한 선사의 망년회에 참석했다. 그 회사는 업무 일정을?양력에 따라?잡았지만 일상적인 세시(歲時)는 음력을 기준으로 관리하고 있어서 망년회는 해마다 양력 1월 말에 열고 있었다. 회장은 해마다 나를 초청했고 다른 특별한 일정이 없는 한 나는 아내와 함께 참석하곤 했다.
그해도 바닷가 골프장의 본관 잔디밭에서 흥겨운 잔치가 열렸다. 우리? 부부는 회장부부와 함께 헤드테이블에 자리잡았다. 거기는 일본의 종합상사 지사장들이 함께 하고 있었다. 일본 종합상사는 선박건조나 판매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존재였다. 그들의 막강한 자금력으로 금융을 알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자리에는 홍콩의 가장 큰 해운 브로커도 같이 했었다. 아일랜드 출신의 경험 많은 브로커였다. 특히 용선 업무에서는 그 해운회사의 일을 거의 도맡아 하고 있었다. 술잔이 몇 차례 돌고 식사도 제법 진행이 되었다. 아일랜드 출신의 브로커가 지나가는 말처럼 일본 지사장들과 나누는 대화가 내 귀로 들어 왔다.
“일본 사람들은 모든 일을 조용 조용히 법대로 하지요. 한국 사람들과는 달라요. 한국 사람들은 너무 시끄럽고 싸우길 잘해서 일하기가 좀 힘들어요.”
일본인들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나 한 순간 좌석이 얼어 붙었다. 그 친구는 술이 얼큰한 김에 일본 종합상사 지사장들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한 것이겠지만, 말이 떨어지고 나서 내가 거기 있다는 것이 모두에게 의식되었던 것이다. 분위기가 싸늘해지자 회장은 중국인 특유의 어물쩍 넘어가는 어조로 나를 다독거리려 하였다. “성, 좀 그런 면도 있지. 한국 사람은 싸우기도 잘 하잖아. 그렇지.”
언젠가 그 친구가 한국사람 몇 사람을 접대하고 있었는데 옆자리에 있던 한국인들이 시비를 걸어왔었다. 우리와 함께 하던 젊은 한국인 후배가 웃옷을 벗어 던지더니 그들의 시비를 가로 막고 나선 일이 있었다. 회장은 두고두고 감탄을 했었다.
“그 친구 굉장했어. 참 용감해. 그 친구가 쿵푸 폼으로 용감하게 나서니까 시비 걸던 친구들이 꼼짝도 못하고 물러섰잖아.”
그 일을 내게 넌지시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아주 또렷한 목소리로 “NO” 라고 했다. 처음 회장에게 하는 대답이었으나 그 뒷이야기는 아일랜드인을 향한 것이었다. 분위기는 완전히 싸늘해졌다. 우선 회장은 내가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고 넘어갈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보통 나는 Smiling Hwang으로 알려져 있었고 엔간한 일에는 무엇이건 분위기를 맞춰 주는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따뜻한 분위기를 살려줘야 할 남의 잔치라고 하지만 중국인 선주와 일본인 종합상사와 유럽인 브로커 사이에 앉은 한국인으로서 참아야 할 일이 있고 참아서는 안될 일이 있었다. 나는 참지 않기로 작정을 했다. 나는 가능한 한 부드럽고 우호적인 어조로 말했다.
“한국인들이 Yes 와 No 를 모호하게 하는 것을 보았는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 비겁하게 물러나는 것을 보았는가. 떳떳한 일에 주눅들린 듯 소근거리는 것을 보았는가?” 나는 노골적으로 일본 사람들의 “yes 와 no에 대한 모호함” 과 시비를 얼버무리는 습성을 걸고 넘어 갔다. 그리고 회장을 설득했다.
“당신이 한국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그들의 솔직함과 적극성 그리고 외향적인 성격 탓이 아닌가. 그러한 성격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한국을 오늘처럼 빠르게 발전시켰고 수많은 좋은 친구들을 확보한 원동력이었다.” 회장은 정색을 하고 말을 받았다. “성, 당신의 말은 정말 정곡을 찌른 것이야. 그럼, 한국 사람들은 다르지. 저 친구가 술을 먹은 뒤 좀 실언을 한 것 같아.”
나는 일본인들과 아일랜드인 누구도 폄하할 생각이 없었고 단지 한국인이 오해되고 있는 것 같아 그것을 바로 잡으려한 것이다. 그들이 한국인을 똑바로 알고 한국인과 진정한 친구가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밤이 무르익으면서 분위기도 풀렸고 회장의 넉살 좋은 농담으로 그날 밤은 그럭저럭 끝이 났다.
귀국한 뒤 한동안 그날 저녁의 일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던 일을 중간에 그만두고 마무리짓지 못한 듯 마음 속이 찌부등했다. 그것은 반드시 매듭지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정식으로 아일랜드 친구에게 그 친구만 보도록 친전 사신을 썼다.
“당신은 일본 사람에게 아부해야 할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런 경우 그들에게 아부하면 된다. 그러나 당신이 잘 알지 못하는 한국 사람을 거기에 부당하게 끌어 들이는 것은 예의에 맞지도 않고 당신이 잘 쌓아온 명망에도 흠이 되는 일이다. 당신이 선박 해운 브로커로서 세계 최고의 조선국인 한국을 올바로 이해한다는 것은 당신의 사업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해서 이 편지를 쓴다. 우리는 아일랜드와 영국과의 관계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일랜드 사람과는 아일랜드 이야기를, 영국 사람과는 영국 이야기를 할 뿐이다. 그들 사이에는 그 나름대로의 오해받을 소지가 많기 때문이다. 당신의 가정 생활이나 당신 부인과의 불미스런 일을 우리는 알지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한국인은 그런 관계를 부끄럽게 생각하지만, 당신이 당신의 일을 남에게 오해받기 싫어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지금 조선해운 일을 하는 사람 중 한국을 폄하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그 편지 자체가 싸움닭 같은 한국 사람을 대변하는 것 아니냐 하는 자책도 있었고 그의 사생활을 건드리는데 약간 망설임이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꼭 하지 않으면 안될 마무리로 여겨졌고 편지를 보낸 뒤 마음도 개운해졌다.
나는 그 아일랜드 사람을 지금도 가끔 만난다. 일본에서 해운회사들이 주최하는 골프 모임에서나 홍콩, 일본에서의 연례행사에서 자연스럽게 만난다. 우리는 한번도 변명을 하거나 사과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먼저 찾아 와서 인사하였고 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솔직한 의사소통으로 쓸데없는 앙금이 충분히 해소되었고 상호 존경이 오히려 단단해졌다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