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한밤중에 날아든 메시지

    함석헌 선생이 지은 ‘그 사람을 가졌는가’ 시비

나이가 먹으니까 확실히 잠이 줄어든 것 같다. 얼마 전 밤 시간이었다. 새벽 1시가 됐는데도 정신이 물같이 맑았다. 그 시각에 갑자기 이런 카톡 메시지가 하나 날아왔다.

‘잠이 안 와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네. 이번에 모시던 그분의 장례를 치렀어. 그분의 장관 시절 내가 비서관을 했어. 그분이 현충원에 들어가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서 내가 절두산교회 납골당에 자리를 준비했는데 그분이 현충원으로 가게 된 거야. 그 바람에 우리 부부가 그 납골당 자리를 얻게 됐네.’

나는 메시지를 보고 그렇게 됐구나 하고 속으로 씩 웃었다. 죽은 장관은 부인과 사별하고 재혼을 했었다. 그러다 병이 들었다. 장관이 죽으면 현충원에 부부가 묻힐 수 있다. 그런데 사별한 부인과 재혼한 부인 두 명이 동시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장관은 조강지처와 현충원 묘지에 묻히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하려면 재혼한 부인이 동의하는 서명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장관의 비서관이던 친구는 그걸 해결해 낸 것 같았다. 장관과 비서의 관계는 직무를 넘어서 영원한 것 같았다. 친구는 한번 인연을 맺으면 끝까지 의리를 지키는 성격이었다. 그런 인품을 가져서 그런지 친구는 장관 자리까지 올랐다. 한밤중에 개의치 않고 카톡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친구를 가진 것에 나는 감사한다. 소중한 인연이다.

친구라면 비오는 날 슬리퍼에 구겨진 바지를 입고 스스럼 없이 불쑥 찾아갈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친구가 자신의 납골당을 마련했다는 데 묘한 느낌이 들었다. 벌써 그렇게 돼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생의 봄인 소년시절부터 햇빛이 쨍쨍 내려쬐는 여름과 열매를 맺은 가을 그리고 눈을 맞으며 서 있는 나무 같은 겨울을 함께 하는 오랜 친구다.

인생의 봄인 고교시절이었다. 그는 반장이었다. 그리고 성적도 일등을 하곤 했다. 나는 그에게 수학을 가르쳐달라고 했다. 그런 인연으로 우정을 맺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대학입시 무렵 그가 성적이 떨어졌다고 침울해졌다. 나는 그에게 한 단계 낮추어 지원서를 쓰자고 권했다. 우리는 함께 입시를 치고 같은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 시절 우리는 고시원 쪽방에서 같이 살았다. 실밥이 터진 낡은 츄레이닝을 입고 오십명이 공동으로 쓰는 재래식 화장실을 사용했다. 화장실을 나오면 몸에 밴 냄새를 없애기 위해 한참 동안 펄쩍펄쩍 뛰었다.

그는 일찍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엘리트 공무원으로 인생의 여름을 맞이한 그는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는 발탁이 되어 장관 비서관을 했고 청와대에 차출되어 가기도 했다. 그는 공직사회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그 무렵 나는 아직 냉기가 남은 스산한 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고시공부를 그만두고 육군 장교로 전방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가 부대를 찾아와 나를 보고 말없이 돌아갔다. 며칠 후 두툼한 소포 상자 하나가 왔다. 그 안에는 이미 고시에 합격한 친구들이 만들어두었던 요점을 정리한 서브노트들이 들어있었다. 그 안에 친구가 쓴 편지가 들어있었다. 근무하느라고 시간이 없으면 그 노트들을 보면서 다시 한번 고시를 치르라는 내용이었다. 우정이 건강하게 지속되려면 내가 합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 눈에서 하얀 눈물이 떨어졌었다. 그리고 그 다음해 나는 합격했다.

그는 청렴했다. 인허가를 담당하는 내무부 요직에 앉아 있으면서도 그는 돈이 없었다. 어느 해 추석이었다. 그는 부하들에게 참치통조림 선물셋트 하나라도 줘야 하는데 돈이 없다고 했다. 몸조심을 하는 건지 주변머리가 없는 건지 답답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는 장관을 그만두고 만원 지하철을 타고 다녔다. 그가 어느 날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지하철 안에서 밑에 있던 직원을 봤어. 장관님이 어떻게 지하철을 타느냐는 놀란 눈빛이더라구. 지하철 타는 게 뭐가 어때서? 그리고 장관을 했다고 사람들이 자리에 자꾸 불러내는데 명색이 장관을 했으면 밥을 사야하는 거야. 그런데 그게 안되니까 조심스러워.”

장관도 여러 종류였다. 잠시 장관을 했는데도 그 후 별 일을 하지 않고 10년 20년을 좋은 집에서 기사가 모는 자가용을 타면서 부를 과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경우 아무래도 그 청렴성이 의심스러웠다.

그는 죽으면 들어갈 소박한 집을 얻었다고 내게 카톡 메시지를 보냈다. ‘잘했다’고 그에게 답을 보내 주었다.

같은 배를 타고 긴 인생을 함께 항해한 친구를 가졌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좋은 친구를 만난 덕분에 외롭지 않게 인생의 바다를 건너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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