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지공거사들의 조용한 ‘분노’

서울 지하철 종로3가역에서 한 노인이 개찰구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코로나 사태 당시였다. 길거리 약국으로 들어가 활명수 한 병을 샀다. 마스크를 벗고 그 약을 마시려는 순간 젊은 남자 약사가 소리쳤다. “나가요.”

그는 마스크를 벗은 노인인 나를 병균 덩어리로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노인을 싫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허리가 아파서 시골의 의원으로 갔다. 의사는 한마디도 없이 진통제만 처방해 주었다.

“엑스레이를 찍어보면 어떨까요?” 내가 물었다. “그냥 가세요” 나의 말에 의사는 귀찮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그에게서 노인 혐오를 보았다.

대학 동창인 변호사와 둘이서 북한강가의 맛집 팥죽가게에 간 적이 있다. 가난한 부부가 시골장터 허름한 가게에서 정성 들여 끓인 팥죽이 소문 나서 사람이 몰린다는 곳이다. 부모는 죽고 아들이 가게를 물려받아 화려한 인테리어로 바꾸어 장사를 계속하고 있다고 했다. 나를 데리고 간 친구가 말했다.

“뒷골목에서 팥죽가게를 하던 노인 부부는 참 겸손하고 소박했는데 그걸 물려받은 아들은 부자가 되서 그런지 천방지축이야. 어제는 내 친구가 와서 팥죽을 여러 그릇 포장해 달라고 하니까 어떻게 그걸 다 포장하느냐고 짜증을 부리더라는 거야. 손님인 자기한테도 어떻게나 무뚝뚝하고 불친절한지 화가 나더래.”

그의 말이 맞는 것 같다. 우리도 미처 팥죽을 다 먹지도 않았는데 주인 남자는 “얘기하지 말고 팥죽만 드시고 빨리 나가달라”고 했다. 우리는 쫓겨나면서 그가 노인을 싫어한다는 걸 어렴풋이 알아챘다. 대부분의 젊은 사람들은 속으로 늙은 사람이 싫어도 티를 내지 않는다. 그렇지만 인격이 모자라는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속내를 드러내기도 한다.

노인은 추하고 둔하고 혐오스러운 존재라는 인식이 ‘에이지즘’이라고 하던가. 나도 어느새 노인들의 나라로 진입하니까 세상이 달라진 걸 느낀다.

지하철역에서 구걸하는 여자 노인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절규하며 분통을 떠뜨리는 걸 봤다. “저년이 나보고 젊어서 뭐했길래 늙어 거지신세냐고 그래요. 야 이년아, 너도 늙어서 나같이 되라.”

그것도 가난하고 약한 늙음과 분노의 모습이었다. 이미 사람들 네 다섯명 중의 한 명은 노인인 나라가 됐다. 소년 시절 화려하던 종로거리에 가면 초라한 노인들이 흐느적거리고 가고 있다. 마치 외국의 좀비영화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을 때도 있다. 더 이상 노인은 특별보호의 대상도 아니고 존중받을 위치도 아니다. 나는 사회의 곳곳에서 노인혐오의 냄새를 느낀다.

노인 나라로 넘어오니까 사소한 일에도 은은한 분노가 일어나고 있다. 주위에서 누가 시끄럽게 떠들어도 화가 난다. 무시하거나 상처를 건드려도 파도에 부딪치는 파도같이 분노가 치솟는다.

며칠 전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가 노인들의 지하철 무임승차 특혜를 없애겠다는 걸 공약으로 내세웠다. 정치공학적 기술을 일찍 배운 그는 젊은이들의 노인 혐오를 동물적 후각으로 캐치하고 표 계산기를 두드렸는지 모른다. 그런 때가 오리라는 걸 감지했었다.

노인나라로 진입할 때 우리들은 ‘지공거사’라고 부르며 서로 흐뭇해 했다. 65세가 되면 나라에서 지하철을 공짜로 태워주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처음 느껴보는 국가의 온기에 노인이 된 우리들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내 주변에는 고액 납세자들이 많다. 우리들이 낸 세금으로 지하철과 도로들이 만들어졌다. 따지고 보면 공짜가 아니었다. 우리들의 땀으로 젊은 사람들이 혜택을 보는 것일 수가 있다.

어느 날인가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무심히 경노석 위에 붙은 글씨를 보았다. ‘이곳은 노인을 위한 자리가 아닙니다. 교통약자를 위한 자리입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맞는 말이지만 이상하게 나는 행간에서 노인 혐오의 옅은 냄새를 감지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자리를 전유물로 아는 이기적이고 고집스런 노인들의 추한 행태가 있기 때문에 할 말은 없다. 지하철을 타면 일반인 좌석 앞에는 가지 못한다. 혹시라도 젊은 사람이 자리를 양보할까봐 미안해서다. 피곤한 사람이 자리에 앉아야 하는 게 맞다. 어쩌다 출퇴근 시간에 불가피하게 지하철을 타는 것도 젊은 사람들 눈치가 보인다. 공짜를 타면 그렇게 되는 것 같았다.

경제적 능력이 없는 노인들은 복지 차원에서 혜택을 보게 할 필요가 있다. 능력이 되는 사람은 요금을 내고 당당하게 탈 수 있는 제도를 병행시키면 된다. 그게 문제가 아니다. 젊어서부터 분노를 팔아 권력을 쥐려는 정치꾼들을 나는 싫어했다.

우리의 불행이 한 계급이나 한 권력자 개인에 있다고 선동하는 부류가 있었다. 어떤 때는 그 화살을 미국산 쇠고기로 돌리기도 했다. 나의 불행을 모두 남 탓으로 만들고 사회가 분노로 들끓게 만든다. 이제는 분노를 힘없는 노인들에게 돌리려고 하는 예감이 든다.

분노는 먼지를 날리고 진흙을 일으킨다. 늙은이도 그 누군가의 불쌍한 아버지이고 고생한 어머니다. 젊은이도 그 누구의 사랑하는 아들이고 딸이다.

사랑만이 세상을 잔잔하게 할 수 있다.

2 comments

  1. 그렇군요 우리 모두 누군가의 아버지이고 어머니이요 또 누군가의 아들이고 딸이군요 잊고 사는 것 일깨워주셔감사드립니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