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나이값’과 ‘시대의 어른’

음식점에서 노인들이 떼로 모여 앉아 고함 지르듯 말하는 걸 본 적이 있다. 귀가 안 들리니까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이다. 주위 사람들이 얼굴을 찡그리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얘기하는 내용도 공허하다. 고집만 남아 자기 생각 이외에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참을성 없고 화를 잘 내고 자신만 생각한다. ‘나이값’을 못하는 것 같다.

‘나이값’은 돈이나 지위 학벌과도 상관이 없는 것 같다.

50대 무렵 패키지여행을 간 적이 있다. 여행길에서 친숙한듯 다가오는 70대 노인이 있었다. 그는 여행을 마치고도 사람들을 불러 모아 밥을 사는 자리를 만들며 정을 나누자고 했다. 다음 번 여행정보도 주었다. 그 노인을 따라 몇 번 여행을 하다가 어느 날 그가 여행사로부터 리베이트를 받는 걸 알게 됐다. 여행객을 모아주고 공짜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그의 이용 도구가 된 걸 알고는 불쾌했다. 늙어서도 너무 돈을 밝히면 ‘나이 값’을 못하는 것 같다.

지난 2년간 묵었던 실버타운 안에서도 그런 종류의 노인이 있었다. 90대의 그는 미국에서 역이민을 왔다. 우연히 그 무렵 미국에 살던 여러 명의 부부가 실버타운에 들어왔다. 어느 날 나는 실버타운의 직원으로부터 그 90대 노인이 리베이트를 요구한다는 소리를 전해 들었다. 미국에서 온 사람들이 자기소개로 왔으니 돈을 달라더라는 것이다. 노인의 말은 거짓이었다. 그 노인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비열한 장사꾼들은 늙어도 버릇을 못 고치는 것 같다.

‘나이값’을 하려면 늙음을 깨닫고 탐욕으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하는 게 아닐까.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베풀어야 하는 게 아닐까.

늙어서도 권력에 대한 욕심의 끈을 놓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이 칠팔십이 넘어도 선거 때마다 늙은 얼굴을 들이미는 노욕에 찬 노인들이 있다.

엊그제 한 방송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한 80대 노인이 대통령을 향해 “이 바보야” 하고 놀리는 걸 봤다. 장관도 하고 국정원장도 지낸 정치 9단이라는 소리를 듣는 분이다. 꼭 그렇게 야유하듯 말해야 했을까. 남의 기분을 배려하면서 나를 표현하는 세련된 화법을 사용할 수는 없을까.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인데 말이다.

지난번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70대 노인이 후배 정치인들로부터 ‘나이값’을 하라는 소리를 듣는 걸 봤다. 그 노인은 수시로 후배 정치인들에게 전방위적으로 말의 총을 쏘고 칼로 찌르는 것 같았다. 잊혀지지 않고 자신을 끊임없이 나타내기 위한 몸부림 같았다.

나이 값을 한다는 것은 진정한 어른으로서의 면모를 갖춘다는 것이다. 어른은 어른답게 살아야 한다. 존경할 만한 어른이 없는 시대다. ‘나이’에 대한 존경심이 변하고 노인을 멸시하는 시대가 왔다. 진정한 어른이라는 것은 대통령후보나 높은 벼슬을 해야만 하는 게 아니다. 내면의 성숙이 있어야 한다. 잘 익은 열매같이 잘 늙은 노인은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볼 줄 알고 다른 사람들을 잘 다독이며 이끈다.

입을 열기 전에 먼저 귀를 열려고 노력한다. 다름을 인정하고 상대방 입장에 서서 그들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들어준다. 자신을 고정관념이나 한정된 경험의 벽 안에 가두지 않는다. 바뀐 세상에서 젊은이들이 훨씬 많이 아는 것을 깨닫고 새로운 것들을 열심히 배운다. 오래 살아온 만큼 적응력도 있고 지혜도 있다. 노인만이 가질 수 있는 노련한 안목과 완숙한 사고를 가지고 있다. 그런 노인이 있을까.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신현확 총리. 신 총리는 신군부의 집권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내각 총사퇴로 물러났다. <사진출처 e영상역사관 국가기록사진>

오래 전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군사반란을 재판하는 법정에서였다. 거기서 웅장한 산 같은 느낌이 드는 노인을 발견했다. 군인들이 엎어버린 전 정권의 신현확 국무총리였다. 그가 증인으로 나왔다. 그 법정에서 나는 역사의 현장에서 그가 한 행동을 알게 됐다. 그는 총을 배에 차고 국무위원들을 협박하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앞에 있었다. 국무위원들은 겁을 먹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치만 볼 때였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을 직접 확인해야겠다며 김재규에게 따졌다. 반듯한 그에게 대통령을 죽인 김재규도 기가 눌렸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을 직접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는 동안 김재규에게 기다리라고 했다. 그 순간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김재규를 체포하고 상황은 반전됐다.

전두환 장군의 세상이 오고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났다. 군인들이 최규하 대통령에게 결재판을 들이대고 서명하라고 했다. 국방 장관의 결재가 먼저 있어야 하는데 국방장관은 종적을 감추었다. 그는 최규하 대통령의 결재를 말렸었다. 그후 세상이 바뀌자 신현확은 군부정권에서 바지저고리 노릇이 싫다고 총리를 그만 두었다. 그는 그렇게 군부정권과 대척점에 있던 인물이다. 학자와 행정관료로 살아온 신현확 총리는 법정에서 전두환 노태우나 그 주변의 군인들을 증오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어느 편을 들지 않고 흔들림 없이 온유하게 진실을 말했다. 그리고 정치의 반대편에 있던 그들을 동정했다. 법정에서 나는 그의 현명함과 인격 그리고 인간적인 무게에 놀랐다. 그는 강직하고 청렴한 삶을 살아온 시대의 어른이었다.

그냥 어른이 되는 게 아니다. 노인들이 나이값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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