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시선] 죽을 때 가져갈 책은?


나는 서울 아파트의 책장을 정리하고 있다. 동해 바닷가에 마련한 집으로 이사 가기 위해서다. 책장에는 내가 읽고 언젠가 또 읽으려고 선정해서 보물같이 보관한 책들이 들어차 있다. 그 책들을 읽고 진한 감동을 받고 인생의 궤도를 바꾼 것들이다. 이미 몇 차례 책을 기부하고 그중 내게 중요한 것들을 남긴 것이다.

그런데 문득 저 책들을 다시 읽기 힘들 것 같다는 느낌이다. 이미 한쪽 눈은 녹내장으로 시력을 잃어버렸다. 다른 쪽 눈은 노안으로 침침하다. 내 눈은 더 이상 독서를 허락하지 않는 것 같다. 뿐만 아니라 밧데리의 한 눈금 같은 내 삶의 남은 에너지도 그 책들을 읽을 용량이 되지 않는 것 같다. 나는 책들을 하나하나 포기한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옆에 놓아둘 책이 어떤 것일까 고민한다. 문득 책을 많이 가졌던 몇 사람이 기억의 오지에서 희미하게 떠오른다.

아흔 살의 김일두 변호사가 살아 있을 때였다. 하루는 퇴계로에 있는 그의 사무실을 갔었다. 문을 열자마자 바닥에 난민같이 수북이 쌓인 책들이 나를 맞이했다. 책장을 꽉 채우고 남은 책들이 바닥에 쏟아져 있었다. 그 뒤에 커다란 나무 책상이 보이고 그 뒤로 김일두 변호사의 작은 얼굴이 숨은그림같이 보였다. 그가 책 무덤 속에 파묻혀 있는 것 같았다. 얼마 후 그의 별세 소식을 들었다. 그 책들은 다시 어디로 흘러갔을까.

박원순 서울시장이 살아있을 때였다. 그는 혜화동 관사의 자기 서재를 구경시켜 주었다. 책이 워낙 많아 대부분을 수원의 도서관에 맡겨두고 자기는 일부만 골라서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 일부도 꽤 많은 것 같았다. 천정까지 닿는 여러 개의 서가에 책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분야별로 그가 수집한 자료들도 많았다. 그는 나중에 시간이 날 때 그 자료들을 이용해서 책을 쓰려고 한다고 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떠났다.

박 시장의 채권자가 소송을 제기했다. 시장 생전에 돈을 꾸어줬다는 것이다. 나는 유족의 대리인이 되어 소송을 맡았다. 그가 소유한 재산은 책밖에 없었다. 주인을 잃은 많은 책들이 빚에 팔려 갈 것 같았다.

소설가 이문열씨의 서재에 여러 번 갔었다. 사방 벽의 책장에 그와 세월을 같이한 듯한 오래된 책이 가득 차 있었다. 어려서부터 그가 애독한 친구 같은 책들도 있고 그가 쓴 자식 같은 책들도 보였다. 실내 사다리를 타고 서가 위로 올라갈 정도로 책들은 높게 쌓여 있었다.

그는 자식 같은 그의 책들이 그가 보는 앞에서 화형식을 당하는 쓰린 경험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그가 쓴 칼럼에 대해 반대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그가 쓴 책들을 관속에 넣어와 그의 집 대문 앞에서 화형식을 거행하는 퍼포먼스를 한 적이 있다. 마음에 큰 상처가 된 것 같았다.

그는 그 자리에 자기 책들의 묘비를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내게 말하기도 했다.

책장을 정리하다가 보니 문득 죽은 강태기 시인이 내게 유언같이 남겨준 말이 떠올랐다. 자동차 수리공 출신으로 소년 시절 두 신문사의 신춘문예에 당선된 그는 천재였다. 그는 젊은 시절을 독서와 인도 순례로 보냈다. 시를 쓰는 일이 본업이고 밥을 위해 더러 다른 일을 한 것 같았다. 가난하던 그는 마지막에 폐암에 걸린 채 임대아파트에서 혼자 살다가 죽었다. 그를 찾아간 내게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신약성경


“엄형, 내가 젊어서부터 본 책들이 꽤 많아요. 그걸 도저히 좁은 임대아파트로 다 가지고 올 수 없었죠. 그리고 몸도 쇠약해져서 그 책들을 다시 읽을 기운도 없었죠. 그래서 생각해 봤어요. 죽는 순간까지 옆에 두고 읽을 책만 골라야겠다고 말이죠. 두 책이 선정됐는데 뭔지 알아요? 저의 경우는 신약전서와 논어 두 권이었어요.”

나는 그에게서 귀한 선물을 받은 것 같았다.

내 경우는 독서를 할 때 나를 감동시킨 진리나 좋은 문장이 있으면 그 때 그 때 밑줄을 치고 공책에 기록했다. 나는 내 전용 공책을 만들었다. 을지로 뒷골목의 인쇄소에 의뢰해서 주머니에 들어갈 작은 원고지 공책을 천권 만들었다. 책을 읽다가 정말 뼈 속까지 스며들게 해야겠다는 부분을 발견하면 원고지 칸에 또박또박 천천히 썼다.

그 안에는 철학도 역사도 문학도 정신세계나 경전들도 들어있었다. 그 작은 공책들이 한 권 두 권 쌓여갔다. 나는 그것들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짜투리 시간이 나면 읽고 또 읽는다. 그것들은 내가 죽을 때까지 옆에 두고 볼 ‘내가 복음’이기도 하다. 오늘은 그동안의 친구들인 책중 특히 일부분만 선택하고 나머지와는 헤어지는 날인 것 같다. 그동안 고맙고 감사했다. 나의 영혼과 인생관 그리고 삶을 바꾸어 준 좋은 친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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