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시선] 앞이 안 보이는 사람들
탤런트 송승환씨가 눈이 안 좋다는 기사를 봤다. 시력을 많이 잃었는데도 여전히 무대에 서고, 방송일을 계속하고 있다. 주변의 우려에 대해 그는 “안 보여도 형체는 알아볼 수 있다. 안 보이면 안 보이는 대로 한다. 안보이면 열심히 들으면서 하면 된다”고 했다. 대단한 집념이 엿보인다. 성실하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게 그에 대한 평가였다.
나도 눈이 상해 보니까 그의 마음을 알 것 같다. 나도 한 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녹내장 말기라는 진단을 받았다. 시야가 극도로 좁아져서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다행히 다른 쪽 눈이 남아 있다. 이제는 그 눈도 노안이고 시력이 좋지 않다. 젊은 시절 정말 건강하고 좋던 눈이었다. 나이먹은 교수들이 돋보기를 꼈다 뺏다 하는 걸 보면 이해하지 못하고 답답한 마음만 들었었다.
주위에서는 눈을 아끼라고 한다. 나는 그 말을 듣지 않는다.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어떤 저항감에 더욱 책을 보고 글을 쓴다. 안 보일 때까지 본다는 생각이다. 안 보이면 그때쯤 죽었으면 하는 마음이기도 하다. 영국작가 밀턴은 시력을 잃고서야 <실락원>을 쓸 수 있었다. 베토벤은 귀가 들리지 않으면서도 작곡을 했다. 인생이란 그냥 자기만의 사막이나 광야를 가는 데까지 가다가 밧데리같이 에너지가 소진하면 정지되는 건 아닐까.
갑자기 기억의 오지에서 옛날에 봤던 한 여성 시각장애인이 내 마음 속으로 들어온다. 공감을 못했던 그녀를 내가 눈이 아픈 지금에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느 날 그녀가 더듬거리면서 나의 법률사무소로 들어왔다. 갸름한 얼굴에 단정하게 빗은 머리가 깔끔했다. 허공을 맴도는 촛점없는 커다란 눈동자가 그가 앞을 보지 못한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그녀가 이렇게 사정을 얘기했다.
“앞이 안 보이는 사람들 몇 명이 평생 저축한 돈을 합치고 융자를 얻어서 연립주택 지하층을 샀어요. 그런데 부실공사를 한 집인지 입주하자마자 하수구가 역류해서 온통 물바다가 되는 거예요. 더러운 물이 들어차서 옷 한벌조차 쓸 수 없어요. 우리들이 아무리 물을 퍼내도 당해낼 수가 없어요. 건축업자는 아무리 전화를 해도 꿈쩍하지 않아요. 참다 참다 법에 호소하기 위해 이렇게 왔습니다.”
“힘드시겠네요.”
내가 먼저 위로의 말을 던졌다. 앞이 안보이는 그들의 삶을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젊어서 고통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예요.”
그녀는 씩 웃음을 지면서 말했다. 독한 고통 속을 살아온 그녀는 여유마저 보이는 것 같았다. 궁금해서 물었다.
“젊어서는 어떤 고통을 받으셨길래요?”
“저는 세 살 때 열병을 앓고 시력을 잃었어요. 거기다 엄마마저 죽고요. 사람들이 차라리 죽으라고 했대요. 그래도 명줄이 끊기지 않고 자라서 안마사가 됐어요. 먹고 살기 위해 매일 같이 안마할 사람을 기다렸죠. 공치는 날이 많았어요. 손님이 불러놓고 그냥 가버리는 바람에 택시비만 날린 적도 있고 술 취한 사람에게서 돈 한 푼 받지 못하기도 했어요. 문을 잠가놓고 성추행하려는 사람도 있고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적도 있어요. 그래도 행복이 찾아왔어요. 똑 같이 앞이 보이지 않는 남자와 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났어요. 손으로 더듬어 아이의 얼굴을 느꼈죠. 기저귀를 빨고 바느질도 했어요. 영하 15도가 되는 겨울날 오토바이 뒷자리에 앉아 안마를 하러갈 때면 뼈까지 얼어붙는 것 같았어요. 그래도 일을 마치고 돌아와 연탄불로 따뜻하게 데워진 달동네 셋방 안으로 들어오면 행복했어요.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아이들이 커서 다 떠나갔어요. 남편도 죽고요.”
늙은 그녀는 혼자인 것 같았다. 머리에는 장독대에 소복하게 쌓인 눈같이 세월의 하얀 눈이 덮여있었다.
“남은 소망이 있다면 뭘까요?”
그녀에게 과연 소망이라는 게 있을까 의문이었다.
“몇 푼 안되지만 그동안 저축한 돈으로 저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돕고 싶어요.”
“더 어려운 사람이라니요?”
“가난해서 밥을 못 먹는 사람과 등록금이 없어서 공부를 계속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제가 모은 돈을 주고 싶어요.”
도대체 그녀를 살아가게 하는 게 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 그녀의 옆에서 지켜주고 위로해 주는 것 같았다.
내 기억의 깊은 곳에 남아 있는 한 장면이 있다. 어항속에 남은 검은 붕어 한 마리의 모습이었다. 무슨 원인이지 몰라도 커다란 눈이 떨어져 모래 바닥에 놓여 있었다. 붕어는 장님이 됐는데도 죽지 않고 지느러미를 약하게 흔들며 물에 떠 있었다. 먹이를 주어도 보지를 못했다. 아마도 물에 녹아있는 냄새로 어쩌다 조금씩 찾아 연명하는 것 같았다. 붕어는 점점 말라갔다. 머리뼈 부분과 몸이 간신히 달라붙어 있었다. 애잔한 마음이 들었지만 나는 그 붕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붕어는 마지막 힘까지 소진한 채 영원히 멈추었다.
인간도 낙타처럼 절망하지 않고 뚜벅뚜벅 걷다가 “아가야 오너라” 하는 그분의 소리를 들으면 그 품에 포근하게 안기면 되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