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시선] 영화 ‘집으로 가는 길’ 전도연씨 같은 피해자 막으려면
오래 전 파리공항에서 서울로 오기 위해 비행기를 기다릴 때였다. 서글서글해 보이는 인상의 한국 여성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버버리코트 한 벌 입고 가 주시지 않을래요?”
그런 방법으로 밀수를 하는 것 같았다. 작은 이익을 미끼로 아니면 사정을 들어주는 셈 치고 그 말을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가 혹시나 옷의 깊은 곳에 마약이라도 감추어져 있다면 어떨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범죄의 도구가 되고 큰 낭패를 볼 것이다.
실제로 그런 사건을 모티브로 영화가 만들어진 걸 본 적이 있다. 한 여성이 마약 운반죄로 외국 경찰에 체포됐다. 그녀가 들어간 감옥은 지옥이었다. 현지 영사관은 그녀를 외면했다. 가족은 실종된 그녀의 행방을 몰라 애를 태웠다. 외국에서 재판을 받고 처절한 고생 끝에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그린 영화였다. 실제로 외국의 감옥에서 고생하다가 온 고교 선배를 만난 적도 있었다. 그는 건설회사의 임원으로 사우디 아라비아에 갔었다. 그가 체험한 감옥 경험을 이렇게 말했다.
“사우디에서 공사를 따려면 왕족에게 거액의 뒷돈을 줘야 해. 서울 본사 명령에 따라 달러를 싸다 줘야 해. 어느 날 갑자기 사우디 경찰에 체포되어 뇌물죄로 구속이 됐었지. 경찰 한 사람이 다리를 벌리고 그 밑 바닥에 나를 엎드리게 했어. 그리고 몽둥이로 패는 데 모멸감이 들더라구. 본사 회장님은 모른 체하고 현지 대사관도 외면하더라구. 그 더운 사우디 감옥에서 3년 동안 징역을 꼬박 살고 돌아왔지.”
그의 말에는 많은 고통이 함축되어 있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이제는 한국도 국제적인 범죄무대가 됐다. 강남에서 국제보석전이 열린 적이 있다. 전시회가 끝난 후 보석이 든 가방이 깜쪽 같이 없어졌다는 보도가 나왔다. 수억대에 해당하는 다이아몬드, 사파이어, 에머랄드들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다행히 보석을 훔쳐가는 렌트카 번호가 CCTV에 찍혔고 그 차를 빌린 외국인이 출국 직전에 체포됐다는 내용이었다. 언론은 그들을 국제 전문보석절도단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콜롬비아대사관 부탁으로 그 사건을 맡게 됐다. 나는 구치소로 가서 콜롬비아인 젊은 부부를 만났다. 릴리아나라는 이름의 여성과 그녀의 남편을 만났다. 그들은 어쩔 줄 모르는 표정 속에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처음부터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국제적인 전문 절도단이 자기들 이름으로 계약된 렌트카를 범죄 현장에서 사용했을까라는 점이었다. 릴리아나라는 여성은 겁먹은 얼굴로 전후 사정을 내게 이렇게 얘기했다.
“우리 부부는 보고타에서 결혼식을 하고 홍콩으로 신혼여행을 갔어요. 홍콩의 호텔에 묵을 때 거기서 한 콜롬비아 남자를 만났는데 우리 부부 보고 아시아로 온 기회에 서울을 꼭 한번 구경하고 가라고 하면서 자기도 일이 있어서 가니까 가이드를 해주겠다는 거예요. 그렇게 하기로 했죠. 그 남자와 김포공항에 같이 내렸는데 그 남자가 우리 부부 명의로 렌트카를 빌렸어요. 그 남자의 안내로 서울구경을 했어요. 낯선 곳이라 그가 없으면 우리는 밥 한끼도 제대로 식당을 찾아 사먹을 수 없었죠. 그런데 그 남자가 우리 부부를 두고 자기 일을 본다면서 렌트카로 잠시 어디를 다녀온 적이 있어요. 그게 다예요. 서울구경을 끝내고 우리 부부가 공항을 통해 귀국하려다가 체포된 거예요.”
옆에 있던 그녀의 남편이 양손을 모아 기도하듯 내게 사정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말했다.
“상자 같은 독방에 있어요. 눕기도 힘들 정도로 좁아요. 얘기할 사람도 없고 가족에게 연락할 방법도 없어요. 다른 감방에 있는 아내를 보고 싶어 미칠 지경입니다. 순간순간이 저에게는 지옥입니다. 저는 밤마다 철창 밑에 서서 어두운 밤하늘을 보면서 하나님 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발 우리 부부를 살려주세요.”
그들 부부의 간절함이 그대로 내게 전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그들 부부의 말을 믿어주고 싶었다. 콜롬비아대사관에서도 그들의 신분이나 결혼 상황들에 관한 자료들을 구해주었다. 법원도 그들이 허위의 제3의 인물을 등장시켜 정교한 거짓말을 한다고는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문득 그들의 감옥생활이 궁금했다. 미국의 교도소에 갇혀 있는 한국인들의 고통을 들은 적이 있다. 매일 햄버거를 먹어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한국 교도소에 있는 미국인 여대생을 만난 적이 있다. 그녀는 밥과 김치를 먹어야 하는 게 고문이라고 했다. 교도소 내에서 다른 죄수들이 공포의 대상인 경우가 많았다. 폭행을 당하거나 강간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한국의 감옥생활이 힘들죠?”
내가 콜롬비아 여성인 릴리아나에게 물었다.
“쌀로 만든 밥을 주는 걸 먹으면서 지내는 데 그건 참을 만해요. 그렇지만 감방에 있는 다른 여자죄수들이 ‘도둑년’이라고 하면서 괴롭혀요. 그 여자들이 교도관보다 훨씬 무서워요. 나 도둑질 안 했어요.”
그녀의 괴로움을 알 것 같았다. 그런 보이지 않는 학대는 법적인 절차로 해결하기는 현실적으로 힘들었다. 법적 절차를 취하면 시간이 걸렸다. 될지 안 될지도 모르고 독방으로 보내지더라도 더 심한 고통일 것 같았다.
“한국 여자죄수들과 한번 당당히 맞서 보세요.”
남미 여자의 강인성을 보고 싶기도 했다. 그녀는 마치 나에게 어떤 허가증이라도 얻은 듯 뭔가 결심하는 표정이었다. 며칠 후 다시 구치소로 갔을 때였다.
“한국 여자 죄수들이 하도 괴롭히길래 그중 제일 힘이 센 여자를 골라 혼을 내줬더니 이제는 다른 여자들이 꼼짝도 못해요. 편해졌어요.”
그녀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들 부부에게 무죄판결이 선고됐다. 그들이 출국하면서 내게 감사 인사를 했다.
외국의 열악한 감옥에서의 공포와 외로운 생활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성경속의 요셉이 그 체험을 얘기해 주고 있다.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의 감옥에 갇혀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상태를 경험하는 것은 엄청난 시련일 것이다. 지뢰밭인 세상을 한 걸음 한 걸음 조심하며 건너가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