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제3의 삶’ 사는 젊은이들

“바닷가에서 ‘제3의 삶’을 사는 젊은 사람들을 보면 다른 것 같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들볶지 않았다. 그들이 아닌 다른 무엇이 되려고 하는 것 같지 않았다. 비교하지 않고 시기와 질투를 벗어난 삶이라고 할까.”

동해 바닷가 마을에서 2년이 흘렀다. 내가 단골로 가는 막국수집이 있다. 매끈하게 잘생긴 40대 셰프가 음식을 만드는 가게다. 셰프는 교수아들이라는 소문이 있다. 맛집으로 소문난 그 가게는 손님이 넘쳐도 점심시간만 국수를 판다. 왜 그렇게 잠시만 장사 하느냐고 물어보았다. 셰프는 아이들과 함께 노는 시간을 놓치기 싫어서라고 했다.

묵호항 근처에 문어로 탕수육을 만드는 맛집이 있다. 젊은 사람이 경영하는 집이다. 그 곳으로 가서 음식을 한번 먹기가 쉽지 않다. 어떤 날은 아직 한낮인데도 음식 재료가 다 떨어져 문을 닫는다고 써붙였다. 영업 하는 날보다 노는 날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래도 어쩌다 영업을 하는 날 보면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그들 역시 돈에 연연하지 않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이 작은 도시에 더러 서점이 보였다. 문이 닫혀 있을 때가 종종 있다. 문을 열어도 책을 파는 것인지 그냥 가게를 지키는 것인지 의문인 때도 있었다. 시간강사 출신인 한 책방 주인은 인생스토리를 만들기 위해 그렇게 있다고 글에 쓰기도 했다.

젊은 날 내가 살던 세상과 많이 다른 광경이다. 그 시절 음식점은 손님 한 명이라도 더 받기 위해 밤늦게까지 불을 환하게 켜둔 채 주인은 졸면서 손님을 기다렸다. 가게마다 치열한 경쟁을 하고 시기 질투를 하기도 했다. 그 당시 목표는 부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어떤 희생을 치를 각오도 되어 있었다.

내 기억상자 속에 들어있는 예전의 광경과 지금의 한적한 바닷가 도시에서 보는 풍경을 보면서 나는 혼란스럽다. 삶의 형태가 달라진 것이다.

며칠 전 어스름이 내릴 무렵 바닷가 도로에 승용차가 여럿 나란히 주차되어 있는 걸 봤다. 차 뒤에서 남자들이 트렁크를 열고 화사한 색깔의 잠수복들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잠시 후 노을이 잠기는 투명한 바닷물 속으로 들어갔다. 어둠이 내리자 바다는 그들 머리에 있는 플래시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의 향연이 푸른 바닷물위에 펼쳐지고 있었다. 그들은 바위 사이에서 문어를 주워 올린다고 했다. 그들이 어부인지 아니면 레저스포츠로 문어를 잡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촌계 소속 어부들 이외에는 해산물 채취가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본 바닷가의 특이하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바닷가 마을에 살아보면서 나는 젊은 사람들의 또 다른 삶의 형태를 본 것 같다. 그들은 특별히 뭐가 되고 싶다거나, 부자가 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생활도 ‘미니멀라이프’를 추구한다. 그렇다고 되는 대로 피동적으로 하루하루 게으르게 사는 것도 아니다. 추상적으로 표현하면 대자연의 흐름을 따라 사는 ‘제3의 삶’이라고 할까.

그들을 보면서 나의 젊은 날의 삶을 돌이켜 봤다. 나는 항상 자신에 대해 못마땅했다. 주변의 성공한 친구같이 되려고 조바심을 냈다. 끊임 없이 비교하고 조급하게 무엇인가를 이루려고 했다. 나는 브레이크를 잔뜩 걸어놓고 차를 운전하는 것과 흡사하지 않았을까. 기운만 빠지고 헛수고 한 경우가 많았다. 내가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룬 친구들을 보면 배가 아프고 마음이 괴로웠다. 시간이 흘러도 그런 내적 갈등은 오랫동안 남았다.

그런데 바닷가에서 ‘제3의 삶’을 사는 젊은 사람들을 보면 다른 것 같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들볶지 않았다. 그들이 아닌 다른 무엇이 되려고 하는 것 같지 않았다. 비교하지 않고 시기와 질투를 벗어난 삶이라고 할까.

나는 그들의 삶을 유학 갔다오고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채 어두컴컴한 방안에 두더지같이 웅크리고 있는 젊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그런 젊은이들이 참 많다. 외국 로스쿨을 나온 아이들의 부모가 내게 로펌 취직을 부탁한 적이 있다. 로펌에서는 사실 그들을 쓸 일이 별로 없다. 그런데 그 부모들은 전문직 자격증만 있으면 세상이 꽃가마를 가지고 와 자식을 태워갈 걸로 착각한다.

이상과 현실의 갭을 메우지 못한 채 그 젊은이들은 어둠 속에 웅크리고 좌절하는 걸 많이 봤다. 동료변호사의 딸도, 아는 교수의 아들도, 나이 사십이 넘도록 자폐증 환자가 되어 어두운 방안에 들어박혀 있다.

머리 속에 들어찬 허영의 거품을 빼고 현실과 부딪치는 게 행복을 찾는 길이 아닐까.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 만족하고 내가 아닌 무엇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없어야 행복이 찾아오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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