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부처님의 모략 대처법
대학 졸업반 무렵 경기도 광주의 한 농가의 방을 빌려 묵고 있었다. 아침이면 맑은 물이 흐르는 시냇가에 가서 세수를 하고 하얀 사과꽃이 만발한 과수원길을 산책했다. 더러 시냇가에서 시골 처녀들이 빨래하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어느 날 저녁 어스름이 내릴 무렵이었다. 내가 책을 보고 있는데 토담 방의 창호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어보니 우락부락해 보이는 청년 세 명이 살기등등한 채 서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몽둥이가 하나씩 들려있었다.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그중 한 청년이 물었다.
“시냇가에서 시계 못 봤슈?” 뜬금없는 소리였다.
“무슨시계요? 못 봤는데요”
세 명의 청년이 의심 가득한 날카로운 눈길이 내 얼굴에 꽂혔다. “마을 처녀가 빨래 할 때 옆에 풀어 놨는데 없어졌대유. 그래서 물어보는 거유.”
“못 봤다구요.”
마지못해 돌아가는 그들의 표정은 나를 도둑놈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이럴 때 사람은 막막하다. 결백을 증명할 방법도 없다. 그들이 나를 의심했다면 내가 하는 말도 거짓말로 들릴 것이고 표정도 행동도 도둑놈 같아 보일 것이다.
며칠이 흘렀다. 다시 그 세 청년이 찾아왔다. 험악하던 얼굴들이 변한 느낌이 들었다. 그 중 한 청년이 내게 말했다. “냇가에서 떨어진 시계를 찾았슈. 우리는 댁이 그 시계를 가져가고 말 안하는 줄 알았슈. 때려 줄려고 갔었슈. 미안해유.”
그렇게 우연히 오해가 풀렸다. 그 시계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나는 얻어맞을 뻔했다. 그런 오해는 순수한 편이다. 일부러 오해를 만들어 내는 게 모략이고 악마가 즐기는 놀이중의 하나였다.
내게 사건을 의뢰한 한 변호사 부인이 있었다. 얼마 후 부부싸움을 했다고 남편의 사무실에 가서 수많은 의뢰인의 귀중한 증거서류들을 불태워 버린 걸 알았다. 그런 성품이라면 끝이 좋지 않을 것 같아 사임계를 법원에 내겠다고 하면서 다른 법률사무소로 가시라고 했다.
“변호사가 바꾸면 판사가 나쁘게 보니까 사임계를 법원에 내지 말고 이름만 그대로 남겨 주셨으면 고맙겠어요.”
남편이 전직 판사였던 그녀는 법관들의 생리를 알고 있었다. 나는 마음이 약해져서 그 말을 들어주었다. 1년 후에 그녀가 내게 소송을 제기했다. 사건을 맡고 법정에 한번도 출석하지 않은 불성실한 변호사니까 손해배상을 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녀는 모략의 고수급이었다. 그런 모략의 함정에 걸리면 증명을 하고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 때 나는 모략에 걸린 성인들의 케이스를 살펴본다.
‘친차’라는 이름의 미모를 가진 여성이 저녁이나 새벽이면 부처님 숙소 주위를 배회했다. 그녀는 마치 그곳에서 자고 나온 듯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는 대중 앞에서 설법을 하는 부처님에게 다가가 그의 아이를 가졌다고 소리쳤다. 부처는 아무말이 없었다.
또다른 모략이 있었다. 부처님을 시기하는 세력이 ‘순다르’라는 여인을 죽여 부처님 숙소 근처에 매장하고 그 살해 의혹을 부처님에게 돌린 사건도 있었다. 결백을 증명하고 해명해야 한다는 제자들에게 부처님은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일주일만 지나면 다 잠잠해 질 것이라고 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반역죄로 모략했다. 유대인들은 돈을 뿌리면서 여론공작도 벌였다. 재판관인 빌라도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다. “진리가 무엇이냐?”고도 물었다. 예수는 침묵했다. 변명의 불필요함을 의미하는 행동이었다.
변호사를 오랫동안 하면서 거짓과 모략이 미세먼지같이 법정에 꽉 차 있는 걸 체험해 왔다. 인터넷 세상이 되면서 거짓과 모략은 세상에 먼지를 날리고 진흙을 일으킨다. 엄청난 양의 모략에 대응하지 않으면 가짜가 진짜가 되는 세상이다. 모략에 대해 침묵하면 긍정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싸우면 그 영혼이 지옥으로 한없이 끌려가기도 한다.
선입견이나 편견의 세상이다. 그걸 바로 잡는 게 쉽지 않다.
예를 들어 한 밤 중에 풀밭을 걸어가다가 한 사람이 거기 버려져 있는 썩은 새끼줄을 밟고 뱀인 줄 알고 펄쩍 뛰어 도망 갔다. 그의 머리 속에 들어온 뱀이라는 인식은 바뀌어 질 수 있는 것일까. 대낮에 그가 밤에 밟았던 썩은 새끼줄을 보여준다면 그가 믿을까? 사람들의 인식은 쉽게 바뀌지 않는 것 같다.
모략을 받고 누명을 썼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 현명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부처님이나 예수님도 가만히 계셨던 것일까.
노자는 한 가지 덧붙였다.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모략했던 자의 시체가 강물에 떠내려오는 것을 보게 될 거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