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시선] ‘죽마고우’가 ‘완벽한 타인’이 된다?
수천명을 거느리던 사장이 있었다. 정치권을 비롯해서 인맥도 넓었다. 그는 사원들에게 잘해줬다. 그런 그가 법의 수렁에 빠지고 십년쯤 징역을 살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나는 그가 있는 지방교도소로 찾아갔다. 어두침침한 감옥 안에서 그는 나를 보고 외외라는 표정이었다. 오래 전에 업무적인 관계가 끝난 내가 찾아간 걸 이상하게 생각한 것 같았다. 나는 절대고독 앞에 있는 그에게 친구가 되어주고 싶었다. 벌판의 구덩이 속에 갇혀 있는 사람을 지나가던 사람이 한번 봐주는 것 비슷하다고 할까.
성경 속에서 그분은 관계가 없어도 감옥에 갇힌 사람을 찾아가라고 했다. 그래서 가게 됐는지도 모른다. 화려하던 그의 얼굴이 어둠침침한 감옥 속에서 백지장같이 하얗게 바래 있었다.
“찾아오는 친구가 있습니까?” 내가 물었다.
“한 명도 없습니다.”
그게 변호사가 보는 현실이었다. 감옥에 있을 때 진심으로 그를 기억하고 찾아주는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외로운 대통령도 봤다. 구속된 대통령의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목숨을 바치겠다던 장관들이 다 도망갔다. 평생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하던 재벌 회장도 등을 돌렸다. 고향 친구나 학교 친구가 다가가는 일도 없는 것 같았다. 대통령 옆에 들끓던 사람들은 한방울의 꿀에 몰려든 수많은 파리떼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평생을 인맥 관리 하면서 친구 수를 자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를 통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는 발이 넓었다. 그를 비난하는 사회적 여론이 일어나고 그는 소송에 휘말렸다. 막상 쓰러지니까 그에게는 친구가 없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평생에 걸친 인맥 관리가 무엇이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친구란 무엇일까. 어느 깊이까지 삶을 공유할 수 있는 게 친구일까. 친구는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게 아니라 깊이가 중요한 게 아닐까.
내가 정신병을 앓고 있는 한 살인범의 사건을 맡아서 처리하고 있을 때였다. 주위사람들이 모두 떠난 그는 밤새 내리는 차디찬 눈을 맞으며 홀로 서 있는 겨울나무 같은 신세였다. 어느 날 그의 친구라고 하면서 조용히 나의 사무실을 찾아온 남자가 있었다. 그가 내게 살인범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정신병이 있고 살인을 했어도 그는 저에게 착하고 좋은 친구입니다. 끝까지 보살피고 도와줄 겁니다. 중학생 시절 그 친구의 집에 가면 그 아이의 어머니는 없는 형편에도 비싼 탕수육을 시켜 주시면서 우리 아들에게 끝까지 좋은 친구로 남아달라고 부탁하셨죠. 그 어머니 대단한 분이었어요. 저는 그 친구를 끝까지 도울 겁니다.”
감옥의 살인범에게 그는 생각만 해도 마음이 든든하고 편안해 지는 존재인 것 같았다. 그는 살인범 친구를 한결같은 마음으로 변함없이 도와주었다. 그리고 진정한 충고를 해 주는 사람이었다. 내가 보았던 깊은 우정의 모습이었다.
그런 깊은 정을 나누는 친구 관계를 보면서 나 자신이 누군가의 그런 진실한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이가 들수록 친구가 더욱 소중하게 다가온다. 친구와의 허물없는 대화는 삶의 활력소이자 영양분이다. 친구라는 이유로 종종 함부로 행동한 걸 반성한다. 사소한 말 한마디 행동 하나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상처를 주기도 했다. 친구니까 이해해 줄 거라고 여겼지만 돌이켜 보니 큰 잘못이었다. 요즈음은 친한 친구들에게 예의를 지켜려고 노력한다. 오랜 친구관계도 서로를 얼마나 존경하고 믿느냐에 따라 우정도 영원하고 깊어지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