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시선] 숨은그림 같은 삶의 메시지들
등산로 입구에서 보면 나뭇가지에 여러색의 리본이 매어 있는 걸 발견한다. 누군가에게 갈 길을 알려주는 표식이다.
인생을 살아오는데도 순간순간 내 길을 알려주는 표지들이 아주 평범한 일상 속에 숨은그림처럼 존재했다. 그것들은 책의 한 페이지에, 드라마의 한 장면에, 또 어떤 때는 무심히 던지는 다른 사람의 한마디에 나의 갈 길을 알려주는 메시지가 있었다.
중학교 3학년 무렵 판자집에 살던 가난한 동네친구가 나와 같이 버스를 타고 가다가 옆에서 한마디 툭 던졌다.
“야, 고시라는 게 있는데 그거 한 큐 잡는 거래.”
“한 큐가 뭔데?”
“나도 몰라. 하여튼 우리같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좋대. 순경 안 무서워해도 되고 부자도 될 수 있대”
우연히 그쪽으로 눈이 열리게 된 단초였다. 익지 않은 우리들의 인식은 거기까지였다. 그때 법대를 가서 고시를 봐야겠다는 막연한 마음이 들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나는 원하는 대학에 갈 성적이 되지 않았다. 어느 날 영어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프린트물을 나누어주었다. 거기에 나와 있는 영어 지문은 소설 ‘차탈레이 부인의 사랑’ 중 한 대목이었다. 그 중 이런 짧은 문장이 있었다.
‘장애물이 있을 때는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도 안 되면 극복을 해야 합니다.’
그 한 줄의 문장에서 나는 엉뚱하게 가고 싶은 대학을 포기하기로 했다. 돌아가기로 한 것이다. 한 단계 낮은 대학으로 지망했다. 그것도 안 될 때는 재수 삼수라도 해서 극복해야 한다는 메시지로 받아들였다. 간단한 한 문장이 내 대학을 결정했다.
동부검찰청에서 검사직무대리로 일을 배우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고교 선배 조영래 변호사가 찾아왔다. 그가 나와 조용히 만난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
“수갑을 차고 묶여온 피의자에게 그 포승을 풀어주고 따뜻한 커피 한잔 담배 한 개피 줘 봤어?”
그 한마디는 나의 뒷통수를 때린 망치였다. 그 말을 듣기 이전에 내 앞에 있는 존재는 사람이 아닌 죄인이었다. 그저 사건기록일 뿐이었다. 나는 메마른 법률 지식으로 스크린해서 세상을 볼 뿐이었다.
30대 중반 법정 스님의 수필집 ‘무소유’를 읽었다. 늦은 가을날 김이 피어오르는 우물가에서 한 승려가 빨래를 하고 있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이 이렇게 욕심없이 담백하게 살 수 있구나 하는 감동이 마음으로 잔잔하게 물결져 왔다. 그렇게 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서점에 가서 스님의 수필집은 물론 다른 수필집 수십권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그 무렵 ‘고개숙인 남자’란 제목의 드라마를 봤다. 탤런트 최불암씨가 신문사 논설위원으로 연기하는 작품이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는 낡은 마루바닥에 놓인 초라한 작은 책상에서 그는 칼럼을 쓰고 있었다. 그는 세상을 향해 바른 소리를 하는 언론인의 표상이었다. 그 모습이 매력으로 내게 다가왔다. 나는 넓은 방에 큰 책상을 놓고 위압적인 모습의 성공한 법조관료보다 그런 존재가 되고 싶었다.
예인선에 조금씩 방향이 틀리는 배같이 나의 인생은 어떤 것들이 조금씩 방향을 틀면서 끌고가는 것 같았다.
내 인생 마흔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였다. 사무실에 앉아 있는데 뜬금없이 성경이 읽고 싶었다. 내면에서 그 욕구가 솟구쳤다. 그 엉뚱한 욕구가 이상했다. 내가 이성으로 그 욕구를 누르자 무엇인가가 내 등을 강하게 떠밀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일어나 차를 몰고 서점으로 가서 성경을 샀다. 그 다음 날부터 성경에 빠졌다. 근무 시간에도 읽었다. 상관이 방을 들려도 그 앞에서 읽었다. 그렇게 30번쯤 읽었을 때였다. 내면에서 어떤 존재가 나보고 사표를 쓰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들었다. 그동안 공들인 시간이나 인간관계 등 모든 것을 버렸다. 그리고 가장 낮은 곳으로 스스로 내려가 다시 시작했다.
내 삶에서 일어난 일들은 돌아보면 내 앞에 나타난 일련의 표식들을 따라온 것 같다. 그 표식들을 따라오니 지금이다.
사실 그 표식들은 숨겨져 있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내가 현실 속에서 불필요한 것들에 너무 시선을 많이 빼앗겨 못 보고 지나친 적이 많았던 것 같다. 세속적인 성공에 관계 없이 나는 결과에 감사하고 있다.
내 머리로 만든 계획과 욕심에 따라 살았다면 중간에 방해를 만나 꺾였을 것 같다. 이제 와서 깨닫는다. 크나큰 계획은 언제나 나의 의지나 계획을 넘어서 있었던 것을.
‘표식’이란 ‘標識’입니까? ‘표지’입니다. 標識는 ‘표지’라고 읽습니다. 국어사전을 찾아 보십시오.
감사합니다. 표지가 맞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