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총리·장관 거절한 남자···그는 자리에 책임질 줄 알았다”

“동경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엉뚱하게 일본의 오지에 있는 공장의 노동자로 취업했다. 그리고 다음은 만주에 있는 방적공장의 직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해방이 되자 그는 국내 최초의 정치학 교수가 됐다. 그는 대학 내에서 ‘모택동 사상’을 강의했다. 한국 최고의 재벌가의 아들이 된 그는 자유민주주의자였다.” (본문 가운데) 

10년 전쯤 한 인물의 평전을 쓴 일이 있다. 나는 돈을 받고 쓰는 작가도 아니었다. 그냥 한 법조인일 뿐이다. 그에 관한 책이 몇 권 있었다. 그를 존경하던 제자들이 쓴 것이다. 나는 나의 시각과 관점에서 쓰고 싶었다. 이미 저세상으로 건너간 한 인물의 일생을 추적하는 것에 호기심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그에 관한 자료 중 자그마한 흑백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5.16혁명이 일어나고 나라의 새로운 대통령이 된 박정희 장군의 서슬이 시퍼럴 때였다. 사진 속에는 박정희 장군이 검은색 안경을 쓰고 차디찬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사진만으로도 서늘한 기운이 풍겨 나오는 느낌이었다. 그 옆에 나중에 중앙정보부장이 된 이후락씨가 공손한 태도로 보좌하고 있었다. 사무실에는 그들 세사람 뿐이었다. 멀리 부동자세로 서 있는 경호원의 신체 일부가 보였다. 누구라도 그 자리에 있으면 오금이 저릴 것 같았다.

그런데 바로 그 앞 의자에 40대쯤의 남자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도발적인 모습 같아 보였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에서 작은 연기가 실같이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 남자의 태도에서 ‘난 너의 혁명이 달갑지 않아’라는 메시지를 느꼈다. 혁명가 박정희가 그를 보는 눈은 검은색 안경에 가려져 있어 알 수 없었다.

몇 년 후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그를 문교부 장관으로 임명하려고 했다. 그는 거절했다. 대통령은 다시 그에게 장관을 하라고 했다. 사업을 하는 그의 집안 자체가 위압감을 느꼈다. 사업가인 그의 아버지가 몇 달이라도 장관을 하라고 종용했다. 만약 대통령의 명을 어기면 사업이 철퇴를 맞을 수 있다는 공포를 느낀 것이다. 그는 장관이 됐다. 그리고 석달만에 손을 털고 나왔다. 그는 진심으로 장관자리가 마땅치 않았던 것 같았다.

그는 본질적으로 권력을 추구하는 체질이 아닌 것 같았다. 일제 시대 그는 조선의 유명한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비상한 머리를 가졌다. 일본 수재들과의 경쟁을 뚫고 동경대학교에 입학했다. 봉건시대의 의식이 사람들의 머리 속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조선시대의 과거시험인 고시에 합격해서 군수가 되거나 판검사가 되는 게 대부분 사람들의 꿈이었다. 동경대학교는 그런 벼슬을 하는 지름길이었다.

동경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엉뚱하게 일본의 오지에 있는 공장의 노동자로 취업했다. 그리고 다음은 만주에 있는 방적공장의 직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해방이 되자 그는 국내 최초의 정치학 교수가 됐다. 그는 대학 내에서 ‘모택동 사상’을 강의했다. 한국 최고의 재벌가의 아들이 된 그는 자유민주주의자였다. 어쩔 수 없이 국가도 미국과 소련 두 나라 앞에 줄을 서야 했던 냉전시대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쪽에 줄 선 것을 현실주의 적절한 선택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제국주의 나라들이 뜯어먹던 만신창이가 된 중국을 지켜내고 통일한 영웅이 모택동이라고 가르쳤다. 그는 당시 지성을 대표하던 잡지 <사상계>나 <동아일보>를 통해 정권을 비판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는 대학의 총장이 됐다.

나는 그의 이면을 엉뚱한 사람을 통해 들은 적이 있다. 내게 그 말을 해 준 사람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심복이었던 이학봉씨였다. 그는 민정수석비서관이었다. 이학봉씨의 변호인이었던 나는 식당의 구석방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얘기 중에 이학봉씨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평전을 쓰는 과정에서 한 인물의 진정한 훌륭한 점을 발견했다. 대통령이나 총리, 장관이 되기 위해 영혼까지 팔아버리는 게 세상이다. 마약보다 강한 권력욕 때문이다.”(본문 중에서) 사진은 김상협 전 총리

“내가 민정수석일 때 어느 날 대학총장인 그 분이 찾아 왔어요. 의과대학을 증축할 땅이 필요한데 학교 뒷산을 그린벨트에서 풀어달라는 거야. 잠시 말을 나누다 보니까 이건 대단한 인물인 거야. 그래서 대통령에게 그 분을 총리를 시키자고 건의했지. 대통령이 그 분에게 총리를 하라고 연락하니까 단번에 거절하더라구. 그래서 흥정을 했지. 총리를 하면 그린벨트에 묶인 학교 부지를 풀어주겠다고 말이지. 그때 전두환 대통령이 그 분에게 말하더라구. 세상 욕은 우리 군출신이 다 먹을 테니까 경륜을 가지신 분이 한번 뜻을 펼쳐 보시라구.”

나는 평전을 쓰는 과정에서 한 인물의 진정한 훌륭한 점을 발견했다. 대통령이나 총리, 장관이 되기 위해 영혼까지 팔아버리는 게 세상이다. 마약보다 강한 권력욕 때문이다.

그는 그걸 거절했다. 어떤 자리건 그 자리에 대한 욕심보다 자신이 그 자리에 맞는가를 생각하는 사람인 것 같았다. 그는 자리에 대한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를 통해 사람들이 추구하는 감투의 의미를 조금은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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