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시선] ‘전관 자랑’ 선배 변호사들 존경 않는 까닭
기억 속에 있는 30년 전의 광경으로 잠시 들어가 본다. 서초동의 법원 화장실 안이다. 재판을 받던 재벌회장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 볼 일을 보고 있다. 전두환 노태우 두 대통령에게 돈을 바쳤는지 뜯꼈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그들은 뇌물죄로 기소되었다.
소변기 앞에 신동아그룹의 최원석 회장이 있다. 한쪽 다리를 약간 들고 볼 일을 본다. 그 옆에 늙은 남자가 긴장한 표정으로 꼿꼿하게 서 있다. 비서가 아니었다. 고위직 법관을 지낸 변호사였다. 재벌회장을 변론하기 위해 함께 온 사람이었다. 소변을 보고 회장이 손을 씻으면서 뭔가를 묻자 그 변호사는 “넷, 회장님” 하면서 군기잡힌 자세로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벌회장은 최고의 신분 같았다. 젊은 변호사인 내가 그런 모습을 보면서 잠시 혼란을 느낀다. 소변기 옆의 변호사인 그는 재판장일 때 법정에서 왕이었다. 뭐가 그렇게 사람을 굴종하게 만들었는지? 그건 돈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신이었다. 그 비굴한 모습을 보면서 나는 더이상은 전관을 자랑하는 선배 변호사들을 존경하지 않기로 했다. 그들도 그냥 고용된 양심 내지 자본주의의 첨병일 뿐이었다.
그 무렵 큰 로펌에 근무하는 변호사인 부장검사 출신의 후배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검사를 할 때 내 앞에서 쥐같이 눈치를 보던 놈이 있어요. 변호사가 되어 그의 사건을 맡았는데 이제는 내가 을의 입장이 되어 그 앞에서 공손하게 끝도 없이 그의 말을 들어주고 있죠. 그리고 그가 갈 때 엘리베이터까지 따라가서 그 앞에서 인사를 해. 왜 그러겠어? 돈을 벌어야 잘 먹고 잘 살고 우리 아이 유학도 보내니까.”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돈의 힘이었다. 권력은 속으로 저항감을 일으키지만 돈은 마음까지 녹여버렸다. 속물들을 움직이는 데도 효과적인 것은 돈이었다. 미친개도 썩은 고기조각을 던져 주면 조용하듯이 속물들은 돈으로 움직이기가 더 쉽다. 민주주의 사회라지만 자본주의에서는 봉건시대 이상으로 계급이 존재하는 것 같다.
백화점의 매장에서 20년 넘게 일하고 있는 친척 여동생이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물건 사 간 졸부 고객이 전화로 트집을 잡으면서 나보고 너 이년 내가 가서 머리를 다 뜯어놓겠다고 그러는 거예요. 백화점에서는 아무리 진상이라도 종업원이 말대답을 하면 목이 잘려요. 그렇다고 그 자리를 피할 수도 없고 말이죠. 그래서 ‘네, 기다리겠습니다. 고객님’ 했죠. 그랬더니 진짜 바로 온 거예요. 그 앞에서 무릎을 꿇었더니 당장 머리를 잡고 뜯더라구요. 참았어요. 같이 백화점에 입사한 여직원 중에 나 혼자만 끝까지 살아남았어요. 오빠. 저는 백화점 오너에게는 노비고, 진상고객에게는 감정 푸는 샌드백 정도 되나”
친척 동생의 자조적인 말이었다. 그래도 지지 않고 열심히 아이들을 키우며 산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은 흑인 노예들을 해방시키면서 미래는 더 심한 계급사회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재벌과 부자, 더 많이 가진 사람과 덜 가진 사람 등 수많은 층의 계급사회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어젯밤 유튜브에서 병색이 완연한 재벌회장의 인터뷰 장면을 봤다. 신동아 그룹의 최원석 회장이었다. 암으로 죽기 전에 촬영한 것 같았다. 30년 전 법원 화장실에서 볼 때와는 전혀 다른 초라한 모습이다. 머리가 헝클어지고 하얀 수염이 턱에 수북이 엉겨붙어 있었다. 그룹이 부도가 나고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그는 회한을 얘기하다가 마지막에 이런 말을 했다.
“젊었을 때는 좋았어요. 늙은 지금은 아니고. 나는 아버지를 잘 만났던 것 같아요. 빨리 가서 아버지를 만나고 싶어요. 젊은 날 같이 일을 했던 회사 직원들한테 미안하죠. 좀 더 잘해줬어야 하는데. 평범한 가정에서 말썽 없이 사는 게 행복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돈이 많았다고 행복한 것 같지는 않았다. 돈은 얼마나 있어야 하는 것일까. 어떻게 벌어야 하는 것일까? 돈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는 없지만 그래도 돈은 행복의 전제조건이다. 돈은 속물에게 모멸감을 당하지 않을 정도는 있어야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제갈공명도 개인적으로 칠십 그루의 뽕나무 수입이 경제적 바탕이었다고 한다.
그걸 어떻게 벌지? 강도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뇌물을 받는 것은 돈을 뺏는 게 아닐까. 거지나 비굴하게 사정하는 사람은 돈을 얻는 것이고. 성실한 땀을 감사의 밥으로 바꾸는 게 진짜 돈을 버는 행위라는 생각이다. 그건 신으로 모셔도 될 귀한 돈일지도 모른다. 빈손으로 저 세상으로 가는 재벌 회장의 모습을 보면서 30년 전의 풍경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와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