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시선] 한일 두 작가의 시간 ‘쪼개쓰기’
한 분이 자신의 삶을 짧은 댓글로 이렇게 표현했다. “소규모 직장에서 근무하다가 오너의 한마디에 목이 잘린 경우가 많았다. 실업급여를 받고 쉬는 기간 동안 교회에 가서 매일 기도했다. 창으로 햇살이 들어오는 조용한 교회가 참 좋았다. 책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돈 걱정 없으면 평생 그렇게 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시적으로 누린 호사였지만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고, 평생 그렇게 살고 싶었다. 먹고 살기 위해서 다시 일한다. 시간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었던 그 기간이 행복했다. 그런 날을 기대하며 하루하루 살아간다.”
글을 읽으면서 나는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조금은 위로가 되는 말을 해주고 싶은데 어떤 걸 얘기할까 생각해 보았다. 변호사를 하면서 여러 형태의 삶을 보았다. 내가 마주친 몇몇 인생을 소개하면 조금은 이해의 폭이 넓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소설가 정을병 선생과 친하게 지냈다. 그가 스스로 시간을 선택하기 위해 어떻게 했는지를 들었다. 그는 젊은 날 매일 아침 종로도서관에 가서 저녁까지 책을 읽었다. 신학대학을 다닐 정도로 그는 신에 대한 관심도 많았다. 그는 시간을 벌기 위해 생활의 규모를 철저히 줄이기로 결심했다. 그는 평생 하루에 한끼를 먹기로 서원했다. 약간의 쌀과 김치 그리고 연탄 몇 장이면 사는데 돈이 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죽을 때까지 평생 하루에 한 끼를 먹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 시간을 마음대로 쓰기 위해 그 정도의 각오를 가졌던 것 같다. 초인같은 그런 자세가 그를 한국의 대문호가 되게 한 것 같다.
국립중앙도서관에 매일 나와 책을 읽는 50대 여성을 만난 적이 있다. 그녀가 그런 시간을 가지게 된 이면에 대해 내게 얘기했다. 대충 이런 내용이다.
독신으로 화장품 외판을 평생 해오면서 서울에 아파트를 한 채 소유하게 됐다. 그녀는 그 후 어느 날 인생 후반부의 삶을 새로 살기로 했다. 아파트를 팔고 허름한 값싼 오피스텔을 샀다. 그녀는 그 차액으로 나머지 인생을 살면서 글을 쓰기로 했다. 이사한 다음날 부터 그녀는 아침이면 버스를 타고 국립중앙도서관으로 갔다. 책을 읽고 점심시간이면 구내식당에서 3천원짜리 백반을 먹는다. 그리고 옆의 공원에서 담배 한 개피를 피는 게 낙이라고 했다. 그녀는 자신의 시간을 스스로 선택하기 위해 많은 것을 공물로 바쳤다고 내게 말했다.
나의 경우는 내 시간을 스스로 선택하기 위해 어떻게 했던가. 긴 장교 생활은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국가에 담보로 잡혀야 하는 것이었다. 제대한 이후의 공직생활도 마찬가지였다. 출세를 위해서는 자기 시간을 포기해야 하는 게 사회풍토이기도 했다. 시간을 스스로 선택하기 위해 변호사가 됐다. 고양이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사람들은 돈을 가지고 변호사의 시간을 샀다. 변호사의 1분 1초가 남의 시간이었다. 시간을 얻기 위해서는 돈을 포기해야 했다. 먹고 살고 아이 학원에 보내야 하는 세상에서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칠십 노인이 된 지금에야 겨우 여유있는 시간을 얻은 것 같다.
시간에 대해 조금은 생각을 달리하게 나를 만든 사람이 있다. 군대에서 훈련을 받을 때였다. 같은 내무반의 친구가 먼지나는 연병장에서 쉬는 10분 동안 포켓에서 작은 성경을 꺼내 몰래 읽는 걸 봤다. 그는 작은 틈만 있어도 공부했다. 그는 훈련이 끝난 후 고시에 합격했다. 그를 보면서 나는 근무를 하면서도 조각시간을 어떻게 활용할 지를 배웠다.
한 노동자가 있었다. 그는 작업복 주머니에 손바닥만한 원고지 수첩을 가지고 다녔다. 작업을 하다가 틈이 나면 그는 연필로 수첩에 소설을 조금씩 썼다. 일본 최고의 작가 마츠모도 세이초였다. 그는 노동과 자기의 시간을 공존시킨 것 같았다. 돈은 시간과 자유를 얻는 중요한 수단이다. 그러나 돈이 그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시간은 어떤 상황이 돼도 남아도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 사이 사이를 쪼개서 쓰면 되는 게 아닐까. 출퇴근 시간의 지하철 안도 좋은 독서 내지 명상의 자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