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그들은 우연히 오지 않았다

“살면서 우연의 만남들이 있었다. 그것들이 마치 예인선이 큰 배의 방향을 바꾸기도 하고, 끌기도 하듯이 내 인생의 흐름을 돕기도 하고 바꾸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나에게 정해진 섭리나 계획이 있고, 그것을 일깨우기 위해 천사들이 사람이 되어 나타나 말해 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의 나는 내게 길을 가르쳐 준 모든 만남과 부딪침의 결과물이다. 그들이 내 삶에 나타난 것에 감사한다.”(본문 가운데) 

대학 2학년 때였다. 도서관에 바위같이 앉아 공부하는 1년 선배가 있었다. 대화를 나눈 적도 없고 같은 대학에 다닌다는 외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어느 날 그가 나를 도서관의 조용한 층계참으로 부르더니 조용히 이런 말을 했다.

“우리 학교는 공부하는 분위기가 아닙니다. 이런 분위기에 휩쓸리지 말고 공부를 하세요.”

그는 평소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가 왜 잘 모르는 내게 그 말을 해주었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그는 후에 사법연수원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판사가 됐다. 그리고 대형 로펌의 대표를 지냈다. 사회에서 그를 만난 적이 거의 없다. 그는 아마 자기가 내게 한 말을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그 충고를 평생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어수선한 대학가의 분위기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사법연수원을 다닐 때였다. 예비군훈련을 받는 과정에서 우연히 늦깎이로 고시에 합격한 사람과 연병장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하게 됐다. 그중에 이런 말이 있었다.

“나는 해군 장교로 구축함을 탔었죠. 그러다가 사법시험에 늦게 합격했어요. 사법연수원이라는 곳에 와보니까 상당히 웃기는 것 같아요. 판검사 출신 교수들은 자기네들이 대단히 출세하고 성공의 표본인 것 같이 우쭐대고 있어요. 연수생들은 그게 최고인 줄 알구 말이죠. 인생이 다양한 건데 검은색 법복 속에 매몰되어 사는 건 우물안의 개구리 같은 거예요. 무지개 빛 인생을 살지 왜 그렇게 살아요? 변호사가 되면 다채롭게 살 수 있어요. 나는 앞으로 시사방송 프로그램 사회를 하나 맡을 거예요. 아직은 그런 변호사가 없죠. 방송에서 받아줄 거로 봐요. 그걸 발판으로 해서 정계로 들어갈 거구요. 그리고 나는 새로운 당을 만들 포부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그의 큰 그릇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바늘구멍 같은 나의 시각으로 앞서가는 그의 말이 생소했다. 그가 말을 계속했다.

“우리의 정치는 사실 그동안 정당이 아니라 정보기관이 주도해 왔어요. 정치를 알려면 정보기관을 알아보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이예요. 한번 거기 가 보지 않을래요? 몇 년 그곳 구경을 하면 많은 걸 얻을걸요.”

그의 말 중에 ‘무지개빛 인생’이라는 단어가 나의 인식의 벽에 단단하게 달라붙었다. 그리고 내가 정보기관으로 들어가는 동기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계획대로 최초로 굵직한 시사 프로그램의 진행자가 됐고 3선의 국회의원이 됐다. 그리고 여당 대표가 되어 대통령과 국정 파트너가 되는 걸 봤다.

내가 30대 중반쯤일 때였다. 하루는 시사잡지의 편집장이 내게 수필을 써 보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공문서 외에는 써 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이상하게 마음이 끌렸다. 편집장은 내게 정식으로 다음 달 잡지에 게재할 수필 원고를 청탁했다. 나름대로 열심히 원고를 써서 편집장에게 가져갔다. 편집장은 나의 원고를 읽고 나서 단번에 잡지에 실을 수 없다고 거절했다. 자존심이 상하고 한편으로 오기가 났다.

“글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그 편집장에게 물었다.

“다른 수필들을 많이 읽어보고 원고지로 쳐서 키 높이만큼은 써 봐야 하지 않을까요?”

나는 그렇게 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 후 그 편집장은 나의 글을 받아주었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나는 여러 일간지 주간지 월간지 등의 원고청탁을 받는 고정 컬럼니스트가 됐다. 40대에 시작한 일요신문의 컬럼은 70대인 지금까지 쓰고 있다.

40대 초 대학 1년 후배의 말 한마디가 나의 인생나침반을 변경시켰다. 그 후배는 같은 건물의 위층에 있는 변호사였다. 하루는 그가 나의 사무실로 놀러와서 이런 말을 했다.

“변호사가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을 하는 것도 괜찮고, 하버드에 유학 가서 전문적인 실력을 늘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또 하나는 고전들을 고시공부할 때 같이 한 20년간 정독을 해서 내공을 쌓는 것도 괜찮은 것 아닐까?”

그의 말을 듣고 나는 머리 속에서 전구가 반짝 켜지는 느낌이 들었다. 독서대를 사서 다음 날부터 고전을 독파하기 시작했다.

살면서 우연의 만남들이 있었다. 그것들이 마치 예인선이 큰 배의 방향을 바꾸기도 하고, 끌기도 하듯이 내 인생의 흐름을 돕기도 하고 바꾸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나에게 정해진 섭리나 계획이 있고, 그것을 일깨우기 위해 천사들이 사람이 되어 나타나 말해 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의 나는 내게 길을 가르쳐 준 모든 만남과 부딪침의 결과물이다. 그들이 내 삶에 나타난 것에 감사한다.

One comment

  1. 우연히 오지도 않지만 받아들여 실천하냐 마냐가 더 중요하고 때론 받아들여 낭패를 보는 일이 더 많죠. 좋게 된 변호사님도 받아들여 힘든 적 많았을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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