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열등감과 자존감
실버타운에서 검사 출신의 노인과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면서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저는 정권을 잡고 있던 TK출신 검사로 승승장구했었죠. 서울법대 재학 중 고시에 합격했죠. 합격 당시 나보다 실력이 좋은 선배들도 많았는데 내가 왜 그렇게 빨리 합격했는지 몰라요. 세상에는 운이라는 게 확실히 있나 봐요. 그때 같이 합격했어도 나이 많은 사람들은 검사로 임관을 시키지 않았어요. 저는 검사로 있으면서 일찍 미국유학을 갔어요. 토플 점수가 검사 중 높았으니까요.”
젊은 시절 나도 그렇게 되고 싶었다. 그런데 나는 그 반대의 길을 걸어온 것 같다. 내 얘기를 솔직히 했다.
“저는 고시를 계속 떨어졌죠. 대학은 졸업했고 군대를 가야했죠. 다행히 그해 군법무관 시험이 있어서 그걸 치고 법무장교가 됐죠. 그런데 군검사로 일을 하면서 초판에 김이 새는 일이 있었죠. 이류가 일류에 대해 가지는 열등감같은 거라고 할까 아니면 고시생의 좌절감이 그대로 남았다고 할까”
순간 나의 기억은 1979년 겨울 어느날 눈이 얼어붙은 안양역 앞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수도군단 사령부에서 근무하던 나는 역 앞에 세워 둔 군용 지프 안에서 새로 전출오는 법무장교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신임 장교가 역에서 나왔다. 금테 안경을 쓴 얼굴이 하얗고 몸이 바짝마른 장교였다. 스물 여섯살로 나와 나이가 같았다. 그는 나를 보자 표정을 무겁게 지었다. 태도도 의식적으로 뻣뻣하게 하는 것 같았다. 점심무렵이었다. 날도 춥고 해서 속을 풀기 위해 그를 데리고 근처의 설렁탕 집으로 갔다. 나는 그에게 점심을 샀다. 당시 육군 중위의 월급이 9만원이었다. 하숙비를 빼면 한 달에 3만원으로 살고 있었다.
밥을 산 건 앞으로 같이 근무를 하게 될 그와 친하게 지내자는 나의 선의라고 할까. 그는 별 말이 없었다. 다음날 사무실로 들어가니까 그가 나를 보더니 딱딱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같은 중위 계급장을 달고 있지만 우리는 같은 입장이 아니요. 나는 고시를 합격하고 왔으니까 검찰청으로 따지면 부장검사고 당신은 나한테 배워야 하는 부하인 셈이지. 앞으로 말을 잘 들으쇼. 그리고 나는 내년이 지나면 제대하고 판사가 될 사람이야.”
나는 갑자기 속이 확 뒤틀렸다. 가뜩이나 고시에의 좌절이 마음의 상처가 됐는데 그 상처를 잡아 뜯기는 느낌이었다.
내가 도전적인 어조로 빈정거렸다.
“대한민국 육군 중위에 시험 출신별로 차이가 있나? 나의 계급장하고 당신 계급장 하고 뭐가 달라? 너하고 나하고 나이도 똑같잖아? 그리고 판사가 뭐 대단해? 요새 계엄이라 감독관으로 법원에 가면 담배에 불도 붙여주고 아부하던데 뭘?”
“어허 반말 쓰지 마쇼. 나는 당신 직속상관이란 말이요.”
그는 나의 태도를 보고 어쩌지를 못하고 팔팔 뛰었다. 그렇게 우리 둘은 한 사무실에서 근무하게 됐다.
한번은 헌병대 수사과장이 우리 둘이 나란히 책상을 두고 있는 사무실로 수사 지휘를 받으러 왔다. 그가 헌병대 수사과장에게 이런 말을 했다.
“옆에 있는 엄 중위는 나 하고 똑같지 않아요. 나는 내년에 제대하면 바로 판사가 될 사람이고 엄 중위는 군에 10년쯤 박혀 있어야 변호사가 될 수 있지.”
그는 내가 고시에 합격하지 못한 사실을 수시로 확인시켜 주었다. 아직 익지 않은 인격이었다. 나도 그랬다. 그는 정원의 나무에 묶여 아버지에게 매 맞은 얘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서울법대에 갔다고 자랑했다. 속은 아직 어린애였다. 화가 나서 사무실 문을 잠그고 그에게 헤드락을 걸어 자빠뜨리고 암바로 관절을 아프게 할까 생각도 했다. 그렇게 하면 그가 막 울 것 같아서 포기했다. 그냥 낄낄거리며 웃고 같이 놀기로 했다. 내가 그의 입장이라도 그와 다르지 않았을 것 같았다.
우리는 퇴근 후 영등포 싸구려 술집을 다니고 밤늦게 여관방에 들어가 팬티만 입은 채 고스톱을 쳤다. 한밤 중 “찹쌀떡, 김밥” 하고 외치는 행상 소리가 들리면 그걸 사서 밤참을 같이 먹기도 했다. 그렇게 놀면서도 나는 마음 한쪽에 차고 딱딱한 것이 박혀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건 상처에서 오는 열등감이었다. 내 스스로 짝퉁 같다는 마음까지 들었다.
나는 하나님에게 열등감을 좀 고쳐달라고 기도했다. 그것만 치료해 주시면 어떤 험한 일을 하더라도 어떤 지위에 있어도 평생 행복하게 나의 인생길을 가겠다고 맹세했다. 길에는 여러 종류가 있을 것 같았다. 프랭크 시나트라가 노래한 ‘마이웨이’도 있고 프루스트의 ‘가지 않은 길’도 있을 것이다. 대로가 있으면 막다른 골목도 있고 길이란 결국 자신의 선택이라는 생각이었다.
하나님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기도를 들어 주셨다. 그런 차별이 싫어서 몇 년 있다가 다시 친 고시에서 최상위권 성적이었다. 자존감이 회복된 것 같았다. 그리고 기도할 때 약속한 대로 내 길을 걸으려고 노력했다. 나 같은 열등감은 세상의 프레임에 묶여있고, 남과 비교하면 누구나 비슷하게 가지는 것 같다. 취업 시험에 떨어진 대학생은 대기업 직원들의 목에 거는 사원증을 보며 열등감을 가질 수도 있다. 뭔가 돼도 남과 비교하면 열등감은 끝이 없다.
1급 공무원이 친구가 장관을 하는 걸 보고 “나는 1급밖에 안되지만”하고 슬퍼하는 걸 봤다. 별 셋의 장군이 별 넷을 달지 못한 아쉬움을 얘기하는 걸 듣기도 했다.
몇년 전 고등법원장이 40년만에 내게 전화를 했다.
“한번 놀러 와요. 보고 싶어요.”
육군 중위 시절 나와 싸우고 놀기도 하던 그였다. 나를 잊지 않은 것 같다. 나도 반가웠다.
검사 출신 실버타운의 노인에게 나의 그런 옛날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
“검사라고 턱없는 사회의 대접에 빠져서 삶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살았어요. 판사들도 마찬가지예요. 고시 출신인 우리만 특별한 줄 알았죠.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고 군검사인 전창열씨가 김재규를 수사하고 기소했죠. 그는 최규하 대통령도, 정승화 육군참모총장도 직접 조사했죠. 일반 검사들은 그런 큰 사건을 해 본 사람이 없을 걸요.”
공허한 관념에 묶여 인생을 끙끙댄 적이 많다. 부자라면 주눅들고 높은 사람이라면 대단한 줄 알고 두려워했다. 이류 삼류라는 열등감이 스스로를 묶기도 했다. 다 자존감 약한 내가 스스로 만든 멍에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