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초등부터 의대 열풍, ‘이면’ 한번 돌아보면…
산부인과 의사인 아내의 언니는 작은 의원을 하고 있었다. 수술을 하다가 환자의 출혈이 심해지면 온가족에게 비상이 걸렸다. 아내까지 동원되어 혈액원으로 피를 구하러 다녔다. 작은 의원에도 풍파가 많았다.
이따금 의원 접수대로 와서 행패를 부리는 환자 가족들이 있었다. 한번은 변호사인 내가 해결사로 불려 갔다. 의원 로비에 기세가 등등한 여성 두명이 10살 넘어보이는 뇌성마비 아이를 앉혀놓은 휠체어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었다. 알아보니 처가의 의원에서 진료도 출산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의원과 어떤 관계인지 물어보았다. 그 아이의 엄마가 임신했을 때 왔었는데 다른 병원으로 갔다는 것이다. 아이가 뇌성마비가 된 데에는 그렇게 거절한 데 원인이 있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산부인과 의사인 아내 언니의 말로는 응급환자도 아니었고 충분히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고 했다.
터무니가 없어보였다. 결국은 누군가를 물고 늘어져 책임을 묻고 싶은 것 같았다. 그들은 하나님한테도 시비를 걸었을 것 같다고 했다. 나는 그들에게 의원측의 잘못이 있다면 소송을 제기하라고 권했다. 법원에서 자잘못을 가리자고 했다.
“애를 두고 갈 테니 책임져요.”
아이의 엄마가 내뱉었다. 그 옆에 나이들어 보이는 여자는 친정엄마쯤 되어 보였다. 휠체어에 앉은 아이만 덩그랗게 남겨두고 그들이 가버렸다. 아이를 인질로 공갈을 치는 것 같았다.
나는 아이를 가만히 살펴보았다. 외모와 말투만 어눌하지 지능수준은 정상 같았다. 아이가 민감하게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내가 미소를 지으면서 아이에게 말했다.
“네 엄마가 나보고 너를 책임지란다. 이제부터 나하고 살자. 그러면 됐지? 우리 집에 데리고 갈께. 만약 그게 싫으면 보호시설로 보내줄께. 내가 경찰에 신고하면 바로 그곳에 보내줄 수 있어. 아무 걱정하지 말아.”
아이를 두고 나간 엄마는 그 근처 어디에서 사태를 지켜보고 있을게 틀림없었다. 내가 파출소에 신고하고 경찰차가 왔다. 나이 지긋한 담당 경찰관은 이따금씩 벌어지는 그런 일들을 대충 짐작하는 눈치였다. 경찰관은 미소를 지으며 아이에게 말했다.
“엄마가 너를 버렸니? 엄마가 안 오면 경찰관 아저씨하고 같이 가서 맛있는 것 먹고 놀자.”
아이가 갑자기 불안한 표정이 됐다. 그 순간 엄마와 아이의 할머니라는 사람이 튀어와서 꽁무니를 빼고 도망갔다. 그들의 말이 조금이라도 납득이 되면 돈이라도 줄 텐데 다시는 오지 않았다. 의사들은 진료보다 그런 일이 더 스트레스인 것 같다.
변호사도 그런 일이 많았다. 형이 선고되면 범죄자들은 자기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다들 불만이었다. 그리고 그 책임을 변호사에게 떠넘기면서 “돈받아 쳐먹고 뭐했느냐”고 행패를 부리는 경우도 흔했다. 나는 그럴 때 변호사를 하는 게 힘들고 역겨웠다.
오래전 여행길에서 만난 오십대 중반의 의사는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작은 의원을 하는데 하루 종일 진료실에만 있으면 정말 답답합니다. 의사지만 실제의 일은 단순한 일의 반복이죠. 돈이 다가 아니예요. 이제는 누가 뭐래도 의원 문 닫아놓고 여행을 합니다. 전에는 안 그랬어요. 그러다 진상환자 만나면 이 직업에 회의가 생깁니다. 환자나 그 가족 하고 아무리 친해도 그 환자가 죽고 나면 가족들 태도가 달라져요. 전부 내 잘못인 양 원망하면서 멱살 잡고 때리려고까지 해요. 전들 살리려고 노력하지 않았겠어요? 돈을 내놓으라고 떼거지를 부리기도 하죠. 그런 진상들을 만나면 몇 년 동안 제대로 입지 못하고 먹지 못하고 모은 돈 다 날아갑니다. 허망하죠. 그래서 이제는 세상 구경을 하면서 살아 가려구요. 사람 살아야 잠시 한 평생인데 그렇게 살기로 했습니다.”
세상은 전문직만 되면 꽃가마를 타고 인생길을 가는 것처럼 착각하기도 한다. 내가 30대 초반 변호사를 처음 시작할 때였다. 그 무렵 서울 옥수동 산 위 동네서 작은 의원을 차린 의사친구가 있었다. 나나 그 친구나 모두 파리를 날리고 있었다. 한번은 점심 때 그의 의원을 찾아갔다. 그가 그날 찾아온 환자를 적은 공책을 보여주면서 내게 말했다.
“오늘 환자가 두 명이다. 동전 몇 개 받은 게 수입이지. 자격증을 따고 의원을 개설했는데 명색이 의사라는 자존심은 있으니까 일반 장사같이 노골적인 영업활동을 할 수가 없는 거야. 죽으나 사나 그냥 환자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 하루 종일 환자는 없고 진료실에 죽치고 앉았다가 저녁 어둠이 내릴 때 내 심정이 어떤지 알아? 얼마 전에는 갑자기 열이 오르고 몸이 아프더라구. 그래서 대학병원에 입원을 했지. 속이 타들어가더라구. 대학병원 치료비 나가지, 내 의원 비용 들어가지. 옆에서 의사가 왜 아프냐고 나를 놀리기도 해. 말이 좋아 의사지 이 험한 세상에서 배에서 쪼르륵 소리가 날 것 같아.”
그 무렵 병아리 변호사인 나도 그와 처지가 다르지 않았다. 의사인 그 친구와 나는 같은 초등학교를 나왔다. 그는 전체 1등을 하고 나는 2등을 했다. 우리 두 명만 속칭 명문이라는 중학교에 입학했다. 작은 의원과 법률사무소가 다른 아이들에게는 성공의 상징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다른 동창들은 우리들의 고통을 배부른 투정으로 치부했다. 그 이면에는 질투와 시기에서 나오는 고소함도 있는 것 같았다.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잘 사는 동창들이 훨씬 많았다.
의대 열풍이 불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의대반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정신적 전족을 채우고 있다. 머지 않아 인공지능이 전문직의 대부분 일을 할 것 같다. 전문직을 부러워하는 사람은 해보지 않고 허상을 보는 건 아닐까. 나는 해봤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그들의 부도 작은 조각땅들의 지가상승에서 비롯된 것이지 그들의 근로소득은 얼마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