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곱게 나이 들어가고 싶다”
사람이 붐비는 지하철역 계단에 웅크리고 앉아 젊은 사람들에게 돈을 달라고 손을 내미는 노파를 봤다. 불쌍한 표정을 짓지만 이상하게도 그 얼굴에서 젊은 날의 어떤 모습들이 느껴졌다. 얼굴에 그 과거가 그림으로 잠재해 있기 때문인가? 며칠 후 다시 그 자리를 지나가다가 허공을 가르는 그 노파의 날카로운 소리를 들었다.
“저 년이 나보고 젊어서 뭐했길래 이렇게 사느냐고 그래요. 야 이년아, 너도 나 같이 되라.”
노파의 저주가 뼈에 사무치는 것 같았다. 그 노파는 왜 늙음의 준비를 하지 못한 채 구걸을 하고 있을까. 젊어서 노후의 준비를 못하고 인생의 절벽 밑바닥에 떨어진 노인들이 많다. 얼굴만큼이나 다양한 사정이 있을 것이다.
인기 있던 가수가 내게 노숙자합숙소에 있게 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내가 그 시설을 후원하는 걸 알고 부탁한 것이다. 왜 그렇게까지 됐을까? 나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한때 대단한 인기를 누렸던 원로가수 현인씨가 이런 말을 하는 걸 들었다.
“공연장을 꽉 채운 관객이 앵콜을 요구하면서 나가지 않는 바람에 같은 곡을 아홉 번이나 부른 적도 있어요. 부르는 노래마다 히트를 쳤죠. 그렇지만 인기라는 건 허망한 거죠. 세월이 가니까 잊혀졌어요. 미국으로 갔어요. 식당을 했지만 실패하고 아내와도 헤어졌어요. 그리고 노인이 됐어요. 아무것도 남은 게 없어요.”
늙고 가난한 것만이 불행의 원인은 아닌 것 같다.
의과대학장을 한 저명한 70대 노의사는 이런 말을 했다.
“돈과 명예가 있다고 노후가 행복한가요? 그런 거 다 소용없어요. 하루라도 따뜻하게 살고 싶어요. 저는 가난한 의대생이었어요. 부자 집 딸과 결혼했죠. 처가에서 작은 의원을 차려줬어요. 매일 번 돈을 아내에게 바쳤죠. 아내도 의사였죠. 저에게 밥 한번 따뜻하게 해준 적이 없어요. 제 어머니가 아들을 찾아와도 역할이 식모였어요. 어느 혹독하게 춥던 겨울날이었어요. 집으로 돌아왔는데 어머니가 찬물로 며느리의 빨래를 하는 걸 봤어요. 가난이 죄였죠. 아내는 제가 번 돈으로 땅과 건물을 샀는데 1970년대 부동산 경기를 타고 엄청나게 값이 올랐죠. 난 돈이 목적이 아니었어요.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어요. 내 분야에서 권위자가 되려고 곁눈질을 하지 않고 살아왔죠. 나는 노력해서 대학병원장이 됐어요.”
그는 모든 걸 다 가진 셈이었다. 70대 노인이 된 그가 어느 날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가출을 했다. 병원장 자리도 그만두고 이혼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내게 그 동기를 이렇게 말했다.
“제가 어느 날 단골로 다니던 한식당에서였어요. 수더분해 보이는 주인여자가 생선 뼈를 발라주고 국이 식을까봐 안절부절 못하는 걸 보면서 가슴이 울컥해졌어요. 그리고 따뜻해지는 걸 느꼈어요. 그동안 산 건 산 게 아니었어요. 그런 건 삶이라고 할 수 없죠. 그래서 집을 나와 작은 방을 하나 얻었죠. 저녁이면 내 방으로 돌아와 빨래판에 팬티와 런닝셔츠를 놓고 빨래 비누를 개서 문댔어요. 노년에 비로소 평안을 찾은 것 같아요.”
그를 보면서 노년행복의 본질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았다.
아직 젊을 때, 더 늦기 전에 노년의 삶을 미리 그려봐야 하지 않을까. ‘나는 이렇게 나이들고 싶다’고 설계를 해보는 것이다. 노년을 미리 준비하지 않는 삶은 자신만 힘든 게 아니라 주위 사람과 사회까지도 피곤하고 불안하게 만든다.
내남없이 젊음이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한다. 젊음이 어느 순간 증발해 버리고 거울 속에서 자신의 늙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보는 게 삶의 현실이다. 나는 나이든다는 것은 무엇인가 수시로 음미해 왔다. 그건 비관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잘 살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나의 과거가 쌓여 현재가 됐고 현재가 축적되어 미래가 되는 것이다.
나는 주변 선배들에게 65세 이후 죽을 때까지 얼마의 돈이 있으면 행복할 수 있을까를 수시로 물어보았다. 나의 기준은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친구나 이웃에게 정을 나누고 소통할 수 있는 돈이었다. 그 다음은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는 취미가 겹쳐진 일이었다. 나는 그걸 글쓰기와 독서로 삼았다. 낮도 아름답지만 밤도 고요하고 안정되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곱게 나이 들어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