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내 안에 있는 영적 존재, ‘하나님’
변호사를 하면서 살인죄로 체포된 두 명을 만난 적이 있다. 그들 두 명 중 한 명이 잔인하게 사람을 난자한 사건이었다. 사이코패스의 짓 같은 느낌이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목격자도 없었다. 그들은 수사기관에서 서로 자기는 죽이지 않았다고 했다. 그들은 법정에서 재판장에게 똑 같이 이렇게 호소했다.
“우리 둘 중의 하나가 칼로 사람을 난도질했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아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가 그랬는지 압니다. 재판장님께서 현명하게 우리 두명 중 진범이 누구인지 판결해 주셔야 할 것입니다.”
성경 속 솔로몬의 재판보다 더 어려운 상황이었다. 재판장은 그들의 말을 듣고 묵묵히 있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판사는 전능자도 아니고 점쟁이도 아닙니다. 법정에 제출된 증거를 보고 이성과 논리로 추론하는 인간일 뿐입니다.”
변호인으로 감옥에서 그들을 다시 만났다. 좁은 접견실 안에는 나까지 세 명밖에 없었다. 그들은 서로 죽인 건 상대방이라고 하면서 내게도 둘 중에 누가 진범인가 알아맞혀 보라고 했다. 수사기관이나 재판부도 누가 진범인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증거도 없고 논리가 개입될 여지가 없었다.
판사는 재판을 거부할 수 없다. O·X문제 식으로 둘 중 하나를 진범으로 찍고 논리를 만들어야 한다. 그게 재판의 현실이었다. 그들 중 하나는 독한 악마가 틀림 없었다.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고 법정에서까지 자기는 아니라고 판사들을 우롱하고 있었다. 연기력이 대단했다. 나는 둘 중에서 그 악마가 누군지를 알고 싶었다. 악마가 마치 게임이라도 즐기는 것 같았다.
나는 그들 앞에서 나의 내면에 있는 존재에게 조용히 물었다. 나는 더러 독특한 체험을 가지고 있다. 흉악한 다른 살인범의 눈에서 서늘하고 푸른 불빛이 흘러나오는 걸 본 적이 있다. 논리로 말이 안되는 소리지만 나는 그들의 눈에서 나오는 살기를 느꼈다. 아주 지저분한 공갈범을 마주 대하고 있을 때 독특한 비린내를 느낀적도 있다. 그게 뭔지 모르지만 내게는 분명히 다른 감각이 있다.
나의 내면에서 뭔가가 여러 징표로 내게 알려주는 존재가 있는 것 같았다. 내면의 존재에게 두명 중 누가 악마인가 가르쳐 달라고 했다. 나의 시선이 잠시 후 앞에 앉은 두 명 중 한 명에게 갔다. 내가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가 아주 짧은 순간 멈칫하는 느낌이었다. 그 뒤에서 뭔가가 당황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전해져 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당신인 것 같습니다”라고 말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내가 할 말이 아닌데 입이 독자적인 의지로 소리를 낸 것 같기도 했다.
“저는 아닙니다.”
그가 고개를 저으며 부인했다. 그래도 나는 그가 틀림없는 것 같았다. 판결이 선고됐다. 재판부는 내가 지적한 사람이 아닌 다른 한 명을 진범으로 결론지었다. 판결이 확정된 후 다시 그들을 만났다. 나의 내면에서 바로 그라고 알려준 남자는 살인죄의 그물에서 벗어났다. 그가 빙긋이 웃으면서 내게 말했다.
“사실은 내가 진범입니다. 재판장은 틀렸고 변호사님이 정답을 맞혔어요.”
소설의 한 장면보다 더 무서운 내가 체험한 현실이었다. 오랫동안 변호사를 한 나는 법정논리와 증거를 그렇게 믿지 않는 편이다. 지능범들이 더 논리적이고 증거도 잘 없애 버렸다. 판사들이 선호하는 논리와 증거는 그들의 판결을 합리화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범죄는 논리나 이성이 아니었다. 감정이기도 하고 격정이기도 했다. 그걸 논리와 이성으로 잴 수 있는 것인지 나는 의문을 가진다. 그걸 말하려는 게 아니다. 인간마다 내면 깊숙이 어떤 영적 존재가 있는 걸 말하고 싶다. 그 존재가 우리의 이성이나 감정보다 더 정확하게 안다. 그 존재는 탈 뒤에 있는 상대방의 영혼의 실제모습을 보게 해주기도 했다.
무심히 살다가 어쩌다 나를 바라보는 경우가 있다. 갑자기 나를 바라보는 나는 누구일까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그게 내 속에 있는 영적 존재이거나 ‘참나’가 아닐까? 나는 그 존재를 성령으로 부르고 있다. 수시로 그 존재에게 묻고 대답을 구하며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