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시선] 세모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생각한다

법정스님의 <무소유> 표지

화면 속에서 대담을 하던 90세 노인 이근후 박사가 갑자기 이런 말을 했다. “법정스님은 왜 ‘무소유’를 소유했을까요? 죽은 후에 자기 책을 더 이상 내지 말라는 게 그거잖아요?”

법정스님이 쓴 여러 책들에 대한 저작권을 행사한 걸 의미했다. 더 이상 그 스님이 쓴 책들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30대 중반 무렵 우연히 작은 문고본 수필집을 읽게 됐다. 세로 글씨로 된 얇은 책이었다. 글 속의 여러 장면이 지금도 마음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서리가 내리는 늦가을 김이 피어오르는 우물 옆에서 한 승려가 찬물에 빨래를 하고 있었다. 소박하게 사는 한 수도승의 모습이었다. 그는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도구만 가지고 혼자 살고 있었다. 법정스님의 수필집 <무소유>였다.

가을 계곡의 맑은 물 같은 그의 문장에 빠져들었다. 그 후 법정스님의 책이 나오면 빠짐없이 거의 다 사서 보았다. 강원도 산골 외떨어진 오두막에서 사는 스님의 삶 자체가 세상에 던지는 메시지자체였다. 그는 이따금 분노나 모멸감, 외로움 같은 감정들을 침묵의 체로 여과시켜 글로 보여주었다.

스님이 며칠 동안 어디를 다녀오면 그 사이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누군가 와서 문도 뜯어놓고 방도 흐트려 놓는 심술을 부렸다는 얘기가 있었다. 세상에는 재미로 남을 해치는 존재들이 있다. 나는 애써서 분노를 자제하는 그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았다. 한번은 스님이 양초와 성냥을 사기 위해 시골 가게로 들어갔을 때였다. 조각 유리창을 댄 방 안쪽에서 “거지”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못들은 척 하고 물건을 사서 나왔다고 했다. 무시당하고 모멸감을 느끼는 삶의 한 조각이었다.

별이 총총한 늦가을 밤 갈대밭에서 그가 밤이 이슥하도록 혼자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아직도 나의 뇌리에 남아있다. 그는 고독을 보라빛 노을이 아니라 당당한 있음이라고 했다. 그의 책들을 읽어가면서 어느 순간 그의 글들이 단순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의 짧은 글들은 불교철학의 진수를 흥건히 담고 있었다. 나는 압축된 경전에서 많은 정신적 영양분을 얻었다.

내가 20대 초쯤 스님과 순간 스쳐 지나간 인연이 있었다. 그때 나는 눈이 깊게 덮인 가야산 해인사 암자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하루는 주지 스님 방에 갔더니 한 구석에 무서워 보이는 얼굴의 다른 스님이 앉아있었다. 눈빛이 날카로웠다. 내게 던져지는 눈빛이 나를 ‘출세주의 속물’로 보는 것 같았다.

그가 법정스님이었다. 그해 겨울 나는 칼바람이 문풍지를 밀고 들어오는 암자의 골방에서 내가 왜 유신헌법을 달달 외워야 하지? 하고 의문을 던졌었다. 그해 나는 고시 1차에 떨어져서 그 절에서 쫓겨났다. 선승끼리 문답을 주고 받을 때 한대 때리기도 하듯이 나는 그 레이저 같은 눈빛에 영혼이 찔린 것 같았다.

법정스님이 돌아가셨을 때 두번째 그를 봤다. 오후 늦게 나는 그의 육신이 아직 불에 타고 있는 조계산으로 찾아갔다. 송광사 입구의 한 음식점 앞에서였다.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은 한 사람이 평상 위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법정스님의 다비장소를 물었다.

“그 사람 누군지 몰라요. 우리 같은 스님이 아니요.”

그의 어조에는 어떤 불쾌감마저 묻어 있는 것 같았다. 법정스님이 왜 평생 산골 오두막에서 혼자 수도하고 살았는지를 알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조계산의 중턱 쯤에서 불이 거의 꺼져가는 장작더미를 만났다. 까맣게 숯이 된 장작 사이사이에서 파란 불이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보라색 연기가 피어올라 소용돌이 치면서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주위에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그곳에 놓여있던 영정사진을 보면서 마음으로 인사를 했다. 그는 영정사진 속에서 무심히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스님의 수상집은 나를 포함해서 많은사람들의 내면에 맑은 연못이 됐다. 그 책들을 읽고 여러 사람의 인생 궤도가 바뀌었다. 생전 그의 글을 다루던 샘터의 편집장은 법정스님이 자기관리가 철저한 사람이라고 했다. 문장에 대한 노력도 대단하다고 했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다가도 좋은 대사가 나오면 바로 메모를 해서 모으는 걸 봤다고 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 것 같았다. 그는 마지막에 자신이 쓴 모든 책을 절판해 달라고 유언을 했다. 왜 그랬을까. 여러 사람이 계속 보아야 할 좋은 책들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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