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시선] “익숙해진 고독은 ‘당당한 있음’이다”

“나는 요즈음 동해항의 빨간등대와 넘실거리는 물결이 내려다 보이는 얕은 언덕 위에 집을 사서 수리하고 있다. 거기서 살다가 내 방에서 조용히 죽고 싶다.”(본문 가운데) 


“혼자 지내도 기쁘고, 할 일도 많다”

중학교 3학년 봄 나는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학생으로서 가장 무거운 형을 선고받은 셈이다. 학교 게시판에는 두 종류의 발표가 있었다. 하나는 최고 성적을 낸 우등생의 탄생이었다. 다른 하나는 최고의 나쁜 학생을 알리는 처벌의 발표였다. 나는 극형에 처해진 셈이었다.

무기정학 처분이 풀릴 때까지 집에서 대기하면서 반성문을 써야했다. 그때 내가 느낀 고통은 소외와 외로움이었다. 학교에서 어떤 학생도 나에게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이 내려졌다. 나는 사실상 양심에 거리끼는 건 별로 없었다. 싸움을 했지만 누구를 괴롭히거나 나쁜 짓을 한 기억은 없다.

소위 명문중학교 안에서 어쨌든 나는 주홍글씨를 붙인 존재가 됐다. 정학처분이 풀려 다시 학교에 갔다. 나에 대한 형벌은 여전히 계속되는 느낌이었다. 아이들은 나를 별종의 인간으로 보는 것 같았다. 뒤통수에서 자기들끼리 눈짓을 하며 웃음을 흘리는 것 같았다. 나는 고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적응하려고 노력했다.

대학에 입학했다. 1970년대 대학은 유신을 반대하는 데모로 들끓었다. 투구를 쓰고 방패를 든 경찰 로마군단과 학생들의 전쟁상태였다. 학교는 아예 문을 닫아 버리고 학생들을 오지 못하게 했다. 나는 또 무기정학 처분을 받은 느낌이었다. 나는 고시공부를 하겠다는 명분으로 깊은 산골 암자나 철 지난 강가의 방갈로 그리고 고시원을 전전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고독에 적응이 되어 갔다. 한겨울 청평의 강가 외따로 떨어진 작은 방갈로에는 칼바람이 들이쳤다.

멀리 다리를 지나가는 기차의 쓸쓸한 기적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촉촉하게 젖는 것 같았다. 고독이 낭만적인 감정의 색깔로 물이 든다고 할까. 눈이 깊게 덮인 가야산 해인사의 암자에서 혼자 한겨울을 나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 문경의 깊은 산 속 절 깊숙한 뒷방에 묵고 있을 때였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밤이면 촛불을 켜놓고 책을 보아야 했다. 어느 날 밤 2시경이었다. 갑자기 내면 깊은 곳에서 표현하기 어려운 희열이 안개같이 피어오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도 좋아. 평생 이렇게 지내라고 해도 난 괜찮아’

뭔가가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듯한 포곤한 느낌이었다.

그 다음해 나는 어쩔 수 없이 장교가 되었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남자라면 청춘의 일부를 국가에 바쳐야 했다. 나는 휴전선을 지키는 최전방 부대로 명령이 났다.

마장동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삼팔선을 넘어 북쪽 끝의 한 마을로 갔다. 버스정류장이 있는 그 작은 마을은 하얀 눈으로 덮였고 그 위로 소리 없이 또 눈이 내려 쌓이고 있었다. 얼어붙은 산 위에 암자같이 혼자 뚝 떨어져 있는 바라크건물이 나의 사무실이었다. 군에 와서도 나는 다른 사람들과는 떨어져 혼자 지내는 운명이었다.

제대하고 나는 법률사무소를 차렸다. 혼자 나의 방에서 지내는 일상이었다. 그런 일상이 30년을 넘었다. 나의 사무실은 나의 암자이고, 기도실이고, 일터이고, 고독한 안식처였다. 혼자 있을 때 내 마음을 살펴보면 겉과 속이 서로 상반된 흐름인 게 느껴졌다. 겉은 고독에 적응하고 끄떡없이 지키는 모습이었다. 내면은 그와는 다르게 공포로 얼어붙을 것 같았다.

공포의 정체는 외로움과 가난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주위에 보살펴 주는 사람 하나 없이 빈 방에서 고독하게 죽을 것 같았다. 다른 하나는 극도의 가난 속에서 죽을 게 무서웠다. 할아버지나 아버지는 저 세상으로 건너가기 전 이미 빈손이었다. 나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능력이 없는 것 같았다. 오히려 다가오는 사람도 밀어내는 성격 같았다. 나는 고독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늙어서 가난해지는 것도 무서웠다. 그런데 부자가 될 사람은 전혀 아니었다.

나는 짧은 기도문 하나를 만들어 주문같이 매일 반복했다. ‘고독한 속에서 굶어 죽을 용기를 갖게 하소서.’ 피하기보다 양팔을 벌리고 맞아들였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무렵 외아들인 내게 이런 유언을 했다. “살아보니까 고독이 제일 힘들더구나. 그렇지만 어떻게 하겠니? 너도 잘 견디고 오너라.”

어머니는 나의 노년의 운명을 미리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외로움을 받아들이고 잘 참아야겠다는 마음 먹었다.

나는 요즈음 동해항의 빨간등대와 넘실거리는 물결이 내려다 보이는 얕은 언덕 위에 집을 사서 수리하고 있다. 거기서 살다가 내 방에서 조용히 죽고 싶다.

내게 익숙해진 고독은 견뎌내야 할 고통이 아니라, ‘당당한 있음’이다. 혼자 지내도 기쁘고, 할 일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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