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젊은 날 추구했던 것들

“사도 바울은 가문의 혈통이나 학벌이나 지식으로 볼 때 당시의 기득권층이더구만. 로마 시민권도 가지고 있었고. 그런 사람이 자기가 가졌던 그 모든 특권을 쓰레기같이 여긴다면서 다 버리고 철저한 예수쟁이가 됐어. 믿음이라는 게 그런 건가 봐.”(본문 가운데) 사진은 영화 <바울> 포스터

실버타운 식당에서 노인들이 소근대고 있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사람이 한밤중에 죽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80대 노인이 이런 말을 했다. “요양원을 거치지 않고 바로 갈 수 있다면 행복한 거요.”

옆에 있던 그의 다른 노인이 맞장구쳤다. “젊어서는 갑자기 죽는 게 사건이었지만 이제는 그건 하나의 축복이라고 생각해요. 긴긴 노년의 시간을 병상이라는 지옥에서 시달리지 않으니까.”

노인들은 자기가 살던 익숙한 방에서 죽고 싶어하는 것 같다. 실버타운에서 노인들은 ‘넷플릭스’의 드라마를 통해 현재의 세상을 보기도 하고 과거를 돌이켜 보기도 한다. 한 노인이 어제 저녁 본 드라마를 얘기했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노량진 학원가에서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던 ‘공시생’의 죽음에 관한 얘기다. 길거리 노점에서 파는 컵밥을 먹으면서도 수험서를 보고 학원 강의도 열심히 듣는 착한 청년이었다. 항상 몇 점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시험에 떨어졌다. 다음 해에는 붙을 것 같아 계속 응시하다가 세월의 물결에 밀려 버렸다. 방향을 바꾸자니 지난 시간이 아깝고 퍼즐 같은 세상 어디에도 들어가 낄 틈이 없었다. 그는 정신병원으로 도피했다가 자살하는 것으로 삶을 마감한다.

드라마는 노인들이 망각했던 지난날을 생생하게 떠올리게 하는 것 같다. 식탁에 앉아있던 교수부부 중 70대의 부인이 미간을 찡그리면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젊은 날로 갈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절대 돌아가지 않을 거야. 그 피를 말리던 세월로 절대로 가고 싶지 않아. 나는 지금이 일생에서 가장 편안한 시간이야. 교수 생활을 하는 동안 프로젝트를 따야 하고 그 예산을 지원받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는데. 다시는 안 할 거야.”

“나도 젊은 날로 다시 돌아가라고 하면 안 갈 거야.” 옆에 앉아 과묵하게 듣던 80대의 교수출신 남편도 동조했다. 그 노인은 좋은 혈통의 집안 같았다. 형제 세 사람이 모두 최고의 명문대를 나왔다. 그 노인은 대학입시에서 수석합격을 하고 유학을 갔다. 그는 미국의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했다. 아내도 교수였다. 그들은 평생을 교수가 지켜야 하는 율법이나 의식절차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들 부부는 미국에서 은퇴하고 돌아온 사람들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위치였는데도 본인들은 많은 고통이 있었던 것 같다.

실버타운 노인들은 더러 과거의 고통과 현재의 삶을 얘기하기도 한다. 육군 대령 출신의 80대 노인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정말 열심히 군 생활을 했어요. 장군이 되고 싶었죠. 대대장까지 마치고 중령으로 육군본부에 근무하고 있을 때였어요. 책상을 마주놓고 업무를 보는 같은 계급의 육군사관학교 출신이 있었어요. 어느 날 그 사람이 날 보고 당신은 아무리 일을 열심히 해도 몇 년 후면 먼저 진급한 자기에게 경례를 해야 할 거라고 하더라구요. 육사 출신이 군대 에서는 귀족인데 나는 출신이 달랐거든. ”

우리가 살던 시대가 그랬다. 불평등과 불공정을 감내해야 하는 세월이었다.

대령 출신 노부부는 예수에 미쳐 실버타운 부근의 시골교회에서 열성적으로 봉사하고 있다. 그 부인은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기도하는 자세로 성경 전체를 필사했다. 남편인 대령 출신 노인이 이런 말을 덧붙였다.

“사도 바울은 가문의 혈통이나 학벌이나 지식으로 볼 때 당시의 기득권층이더구만. 로마 시민권도 가지고 있었고. 그런 사람이 자기가 가졌던 그 모든 특권을 쓰레기같이 여긴다면서 다 버리고 철저한 예수쟁이가 됐어. 믿음이라는 게 그런 건가 봐.”

그는 지혜를 얻은 것 같다. 지혜가 없는 자의 정욕은 끝없이 자란다. 거기에 매달려 있는 사람은 늙어도 정신적 미숙아다. 우리들은 젊어서부터 좁은 시야 속에서 욕망을 채우려고 하다가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욕망을 억눌러 가라앉히는 것이 가장 이익이 아니었을까.

노년세대가 되니까 우리는 평등한 세상을 맞이했다. 실버타운의 공동식당에는 장군도 장관도 병사도 똑같은 식판 위에 똑같은 밥과 국을 받아서 먹고 있다. 박사도 교수도 없다. 그냥 노인으로 불리면서 모두 평등하다. 군 출신들은 죽어서 국립묘지로 갈 때도 공평하게 자리를 배정받아 땅속으로 들어간다. 지위나 자격은 잠시 입었다가 벗어버린 헌 옷인 것을 그들은 자각한다.

돈도 그렇다. 각자 소박하게 살 최소한의 돈만 있으면 된다. 젊어서 대단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다 물거품같이 의미가 없는 것으로 변한다. 인간은 무엇을 추구해야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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