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시선] 나병 노인과 아들…”사랑은 모든 걸 고칠 수 있다”

나는 오래 전에 보았던 영화 <벤허>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영화 속 그 도시에서 나병환자들은 외곽의 험한 바위산에 버려졌다. 멀리 갔다가 돌아온 아들이 누이와 엄마가 나병에 걸려 버려진 사실을 알고 그 바위산으로 찾아간다. 동생과 엄마는 바위 뒤에 숨어서 그를 본다. 아들이 엄마와 동생을 보고 다가간다. 엄마는 오지 말라고 손을 휘젓는다. 보고 싶지만 만나서는 안되는 운명이다. 아들은 나병을 개의치 않고 다가가 엄마와 동생을 꼭 껴안는다. 진한 눈물이 흐른다. 그 순간 나병이 깨끗하게 고쳐지는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다.

종일 비가 쏟아지고 강한 바람이 불었다. 성난 파도가 하얗게 들끓으면서 몰려와 바위를 때리고 절벽 위로 치솟아 오른다. 나는 바닷가를 걷다가 찻집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차를 마시면서 내면의 깊은 의식 속에서 어떤 것이 떠오를까 기다려 본다. 때로 어떤 장면이 눈앞에 나타나기도 하고 한번 스친 사람들이 뜬금없이 마음속으로 쳐들어오기도 한다. 그 한순간을 잡아 형상화하는 게 노년의 하루 글작업이다.

오늘은 기억 속의 청록빛 안개 저쪽에서 한쪽 눈이 누렇게 변색되고 얼굴이 코끼리껍질같던 나병 앓던 한 노인이 보인다. 20여년 전에 봤는데 지금은 천국에 있을 확률이 많다. 내면의 스크린에 펼쳐지는 그 영감이 있는 곳으로 나의 영혼이 순간이동을 한다.

논산 부근 국도변에서 조금 떨어진 나환자 마을의 모습이 나타난다. 오후 두시경의 뙤약볕이 나뒹굴고 바닥의 진흙이 바짝 말라 갈라 터져 있다. 사람이 없는 마을 공터에 희고 붉은 접시꽃이 나른하다. 어떤 일로 그 마을에 갔다가 그 노인을 만났다. 얼굴로 보면 그는 나환자가 아니라 그 병을 앓았던 사람이다. 더 이상 균이 활동하지 못하는 완치가 된 상태였다. 다만 흉칙한 병의 흔적 때문에 세상과 떨어져 살고 있었다. 그는 내게 자신의 사연을 이렇게 말했다.

“저는 대전의 명문고와 대학을 졸업하고 공무원으로 일했죠. 그런데 공무원으로 근무하는 중에 제가 나병이 걸린 사실을 알았어요. 그때는 나병이면 문둥이라고 해서 바로 지옥이었죠. 직장동료도 기겁을 하고 집에도 있을 신세가 못 된 거예요. 그래도 생명이 모진 것인지 죽지 못하고 저는 문둥이가 되어 구걸을 하고 다녔습니다. 아이들은 나를 보면 자기들 간을 빼먹는다고 돌을 던지기도 했어요. 배가 고파 밥을 달라고 구걸하러 갔다가 몽둥이로 죽을만큼 얻어맞고 쫓겨나기도 했죠. 사람들이 나한테 침을 뱉기도 했죠. 저 같은 사람들이 이 야산에 모이기 시작하면서 나환자 마을이 형성된 겁니다.”

나병을 앓던 사람들이 그곳에 정착해서 돼지와 닭을 키우고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그는 촌장 위치인 것 같았다.

그가 말을 계속했다.

“내 고등학교 동기가 대전시장을 지내기도 했고, 외국에서 대사를 지낸 친구도 있어요. 그리고 내 막내아들이 지난해 서울대 시험을 봤어요. 아깝게 떨어져서 지금 재수를 하고 있는데 이놈이 아주 공부를 잘해요.”

그의 마음에는 그래도 아직 세상이 남아 있었다.

“장한 아들이네요. 아들이 보고 싶으면 이렇게 혼자 살지 말고 찾아가 보시지 그래요?”

내가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의 눈동자에 아들에 대한 자랑과 간절한 그리움이 서려 있다.

“에이, 제가 어디 찾아갈 수 있나요? 몸이 이렇게 되면 그럴 수 없는 거예요. 제 소원은 이제 고통없이 죽는 거예요.

보통 사람이라도 제 나이가 되면 신경통이 생기고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합니다. 저 같은 나환자들은 독한 약을 많이 먹어서 그 후유증으로 저녁이 되면 온몸에 안 아픈 데가 없어요. 그냥 고통 없이만 죽었으면 좋겠어요. 절대로 아들 인생에 내가 흉터가 되어서는 안 되죠.”

그의 마음이 물결이 되어 내 가슴으로 흘러들어 왔다. 변호사를 하면서 인간의 불행을 많이 봤다. 불행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어느 날 벼락같이 다가오는 것 같다. 그 이유도 알 수 없다. 불행은 3박자로 왔다. 연이어 파도같이 들이닥쳐 인간을 완전히 파괴해 버리기도 했다. 사람들이 느끼는 안정과 평화는 사실상 어항 속 금붕어의 편안함 비슷한 게 아닐까. 얇은 유리가 깨지면 금붕어는 마른 바닥에서 아가미를 들썩이며 숨을 헐떡거린다. 그런 금붕어가 불행해진 인간의 모습은 아닐까.

영화 <벤허> 한 장면

그 노인과 헤어지면서 나는 오래 전에 보았던 영화 <벤허>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영화 속 그 도시에서 나병환자들은 외곽의 험한 바위산에 버려졌다. 멀리 갔다가 돌아온 아들이 누이와 엄마가 나병에 걸려 버려진 사실을 알고 그 바위산으로 찾아간다. 동생과 엄마는 바위 뒤에 숨어서 그를 본다. 아들이 엄마와 동생을 보고 다가간다. 엄마는 오지 말라고 손을 휘젓는다. 보고 싶지만 만나서는 안되는 운명이다. 아들은 나병을 개의치 않고 다가가 엄마와 동생을 꼭 껴안는다. 진한 눈물이 흐른다. 그 순간 나병이 깨끗하게 고쳐지는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다.

벤허의 한 장면

사랑은 모든 걸 고칠 수 있다. 내가 만났던 그 나병을 앓았던 노인은 이미 그분이 병을 고쳐주었다. 서울대 시험을 친 아들이 합격증을 받고 찾아갔는지 궁금하다. 그래야 하는 게 아닐까.

그 노인이 지금도 애잔하게 마음 속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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