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자신에게 맞는 재미

“아라비아의 감옥에서 징역을 살았던 선배는 3년간 그곳에서 바둑실력이 늘었다고 했다. 노숙자시설에 가보면 사람마다 자기의 놀이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 나이에 내가 가진 것만으로도 즐거움을 느끼는 일이 진짜 재미 아닐까.”(본문 가운데) 

동창회 밴드를 통해 고교동기들의 사진과 활동들이 소개되고 있다. 친구들끼리 모여 당구도 치고 바둑을 두기도 하는 것 같다. 그게 끝나면 음식점에 모여 막걸리를 마시면서 옛시절 얘기를 하면서 노년을 보내는 즐거운 모습이다.

혼자 서민 아파트에서 무료하게 사는 노인을 봤다. 만날 친구도 없고 찾아갈 곳도 없다. 방에서 혼자 책을 들고 바둑판 위에 혼자 알을 놓아보지만 밋밋한 표정이다. 노인은 젊은 날 사두었던 문학책을 들춰봐도 그 내용들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다. 젊어서부터의 노는 것에 대한 선행학습이 되어있지 않은 듯하다.

텔레비젼을 옆에 켜 놓아도 그 내용에 공감이 가지 않는다. 권태를 느끼며 하루하루 정물같이 살다가 병이 들어 마비가 된 채 죽어간다. 내가 40대 말 한 드라마에서 보고 충격을 받은 장면이다. 그걸 보면서 아직 젊었을 때 늙어서 재미있게 살 방법을 미리 강구해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평생을 시험이나 직업적 전문분야에 대해서는 준비를 해왔지만 노년의 무료함에 대한 대비는 소홀했다. 아니 소홀했다기보다는 잡기에 무능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하다. 밤 새워 고스톱을 배워도 실력이 조금도 늘지를 않았다. 남들이 내 패를 다 읽고 돈을 따갔다. 돈을 잃어도 무덤덤하다. 포커를 해 봤다. 내 표정만 봐도 뭘 가졌는지 다 알겠다고들 했다.

어쩌다 돈을 따도 기분이 그저그렇고 잃어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재미가 없었다. 골프도 마찬가지였다. 시도는 해 봤다. 다른 사람들의 공은 파란 하늘에 포물선을 그리면서 멋지게 날아가는데 내 공은 픽 앞으로 떨어져 제 맘대로 굴러갔다. 부끄러웠다.

남들이 바둑 두는 모습을 보면 신선같아 보였다. 환갑이 넘어 뒤늦게 폼이라도 잡아보려고 시도했다. 두어줄 사람이 없어 컴퓨터 바둑으로 시작했다. 같은 18급인 상대방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이 병신아 너 돌대가리야? 호구에 돌을 갖다 놓는 게 어디 있어?’

한 참 있다가 다시 글이 왔다.

‘엄마가 학원 가래. 나중에 또 하자.’

손자 뻘 아이한테 욕만 쳐먹고 늙어서는 바둑이 안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잡기에 능해야 남들과 어울려 노년이 즐거울 텐데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무래도 나는 혼자 놀아야 할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까 어려서부터 혼자 놀았다. 동네 만화방에 가서 종일 혼자 죽치고 있었다. 집에서도 구석방에 혼자 앉아 수수깡으로 비행기를 만들면서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곤 했다. 중학교부터 동시 상영하는 3류영화관을 혼자 순례하면서 영화를 봤다. 나는 늙어서도 혼자 놀아야 할 운명 같았다.

나이 오십 무렵 우연히 컴퓨터 놀이를 시작했다. 블로그를 만들어 글을 올려 보았다. 내게 글은 초등학교 시절 수수깡으로 모형비행기를 만드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라고 할까. 문장들을 정교하게 깎고 다듬어 글을 만들면 작은 성취감이 들었다. 어떤 내용을 글에 담을까가 블로그 놀이의 관심사다.

성경 속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약점 외에는 어떤 것도 자랑하지 말라고 했다. 거기에 깊은 뜻이 있을 것 같았다. 자기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나의 지나간 삶에서 부끄럽고 못났던 것들이나 받은 상처들을 나는 얼마나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을까 궁금했다.

세상은 성공담보다는 진창에서 허우적대는 비참한 모습을 더 재미 있어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더러 그런 글을 올리기도 했다. 내 작은 글을 진지하게 읽어주고 마음을 받아주는 독자들이 몇 명 생겼다. 그런 분들 앞에서 내 상처를 드러내면 마치 맑은 강물에 칼에 베인 손가락을 넣어 씻은 듯 치유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런 블로그놀이가 벌써 20년이 된 것 같다. 돈이 들지 않고 늙어서 혼자 놀 수 있는 괜찮은 놀이라는 생각이다. 노년의 또 다른 나의 놀이는 명상을 하면서 혼자 천천히 자유롭게 해변을 걷는 것이다.

산책 하다가 백합조개 껍질을 수집하는 노인을 봤다. 허름한 아파트에서 그걸 가져다 새도 만들고 나무도 만든다고 했다. 바닷가에 작은 집을 짓고 살면서 시를 쓰는 80대 노인을 만나 친구가 되기도 했다.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이 살아온 얘기를 듣는 재미도 괜찮다. 재미있게 살겠다고 마음 먹으면 누구든 어디에서든 언제든 재미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아라비아의 감옥에서 징역을 살았던 선배는 3년간 그곳에서 바둑실력이 늘었다고 했다. 노숙자시설에 가보면 사람마다 자기의 놀이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 나이에 내가 가진 것만으로도 즐거움을 느끼는 일이 진짜 재미 아닐까.

자신에게 맞는 그런 재미를 찾는 것이 진정 나이답게 늙어가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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