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총무원장의 죽음과 시베리아 자작나무

엔제 자작나무 숲 <사진 한국관광공사>

1973년 냉기 서린 바람이 불던 2월 무렵이었다.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두 소년이 가야산 해인사를 찾아왔다. 그들은 머리를 깎고 행자 생활을 시작했다. 수백명 넘는 스님들 밥을 짓고 불을 땠다. 넓은 절 곳곳을 청소하고 빨래를 했다. 둘은 그렇게 2년 가까이 행자 생활을 하다가 스님이 되어 자신에게 주어진 길로 떠나갔다.

세월이 흘렀다. 그중 한 사람은 종단의 총무원장 선거에서 압도적인 지지율로 당선됐고 재선에도 성공했다. 그에게 세상이 고개를 숙였다. 대통령 후보들이 달려와 차를 마시면서 덕담을 했고 수많은 사회 명사들이 추파를 보냈다.

그는 불자들의 우상같이 되었고 세상의 명예와 부도 따랐다. 그와 행자 생활을 같이 했던 또 다른 스님은 평생 불경을 공부하고 참선을 하며 선정에 잠기곤 했다. 교단의 권력을 잡고 정상에 있던 그 스님이 어느 날 갑자기 그가 있던 건물에 불을 지르고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아는 선배가 카톡으로 보내준 글의 핵심내용이었다. 나는 무엇이 교단의 권력과 명예와 부까지 가진 그 스님을 죽게 했을까 의문이었다. 사람이 죽기 전에는 살았던 순간들이 주마등같이 눈앞에 펼쳐진다고 한다. 그에게 하얗게 눈 덮인 가야산 절의 문으로 들어올 때가 떠오르지는 않았을까. 승려로서 일평생 그가 추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어느 분야나 두 가지 길이 있는 것 같다. 세상의 기쁨을 누리는 길이 있고 영혼의 기쁨을 누리는 길이 있다고 할까.

법조에서 변호사 분야도 비슷하다. 나는 변호사를 시작할 때 암자의 뒷방 같은 조용한 나의 사무실을 만들고, 그 안에서 책 읽고 글 쓰며 사색하는 꿈을 꾸었다. 감동적인 영화를 보고 강변을 산책하면서 노란 유채꽃과 강물에 스며드는 노을을 즐기고 싶었다. 논쟁에서 이기고 1등을 추구하기보다 현재 하는 일에 몰입하면서 그 자체를 즐기고 싶다. 오랜 벗들과 스스럼없이 하는 농담을 즐기고 싶었다. 나는 그걸 영혼의 느낌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변호사의 길은 그것만이 아닌 것 같았다. 대한변협 회장이라는 업계의 대표가 되기 위해 집요한 사람들을 보았다.

대한변협 회장은 대법원장이나 법무장관과 함께 법조의 삼륜 중 하나라는 명예를 가지고 있다. 사회에 대두하는 각종 이슈에 대해 성명을 내고 논평을 하는 지성인 단체의 대표이기도 했다. 그것은 조선시대 사림 같은 지위라고 할까.

선거를 통해 스릴과 흥분을 느끼고 당선이 되면 박수갈채와 인정을 받았다. 주목 받고 칭찬 듣고 유명해지고 나름대로 업계의 권력이라는 성공을 휘어잡는다. 국회의원으로 나가는 변호사도 비슷한 것 같다. 당선된 사람을 보면 공중에 붕 뜨는 느낌을 받는 것 같다. 한번 그 맛을 보면 중독이 되는 것 같다. 그 맛에 굶주리고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그 맛을 추구하는 것 같다. 그런 자리는 공짜로 얻어지는 게 아니었다. 무서운 집착을 가지고 시간과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다. 그 과실은 엄청나게 달콤한 것 같다.

주위에서 떠받쳐 주었다. 칭찬 받고 인정 받고 박수갈채를 받았다. 세상이 주는 그런 쾌감은 그것에 중독되고 갈구하는 사람에게 가는 것 같다. 그런 걸 세속적인 쾌감이라고 표현하면 실례가 안될지 모르겠다. 사회가 만드는 자리는 권력욕이나 명예욕에 중독된 사람들을 조종하는 세상의 발명품이라고 할까.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는 각자의 선택이고 자유의지다.

나는 그런 자리에 휘둘리지 말아야 세상을 바로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20여년 전 시베리아대륙 횡단열차를 타고 여행한 적이 있다. 열차 안에 한국인 여행객이 대충 20명 가량 됐다. 열차는 하얗게 눈 덮인 자작나무숲을 뚫고 가고 있었다. 바이칼호수의 푸른 물이 보이고 지평선으로 붉은 해가 떨어지는 아름다운 광경이 끝없이 펼쳐졌다. 승객 중의 두 영감이 싸우는 걸 봤다. 시베리아철도가 총 몇 km 되느냐를 놓고 그들은 여행 내내 심각하게 싸웠다.

여행객 중에는 그 짧은 순간 주도권을 놓고 싸우기도 하고, 열차의 좋은 자리를 놓고 다투기도 했다. 서로 눈치를 보고 머리를 굴리다가 그 많은 아름다움을 놓치고 여행을 끝내는 사람이 많았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스릴과 흥분이 있지만 허망함이 그 끝이 아닐까.

영혼이 받는 기쁨은 고요한 충족이 아닐까 생각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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