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메모 충실히 하는 기자, 자료 받아쓰는 기자
메모를 잘하는 선수들을 본 적이 있다. 팔십 가까이 기자의 외길을 가는 조갑제 대표가 사람들을 만날 때 옆에 있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조갑제 대표는 진지하게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면서 이따금씩 손바닥 만한 작은 수첩에 단어 한두개나 간단한 기하학적 도형을 그렸다. 나중에 기억 속에 저장된 내용들을 탐색하고 다시 꺼내는 키워드 내지 비밀번호의 역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수의 메모는 그렇구나 하고 생각했다. 속기사처럼 앞에서 그대로 받아쓰면 상대방의 진정한 의도를 놓치기 쉽다. 받아쓰는 걸 보면 상대방이 속내를 털어놓지 않을 수도 있다.
그 다음으로 메모의 천재는 박원순 서울시장같다. 그와도 여러 번 밥을 같이 먹고 얘기를 했었다. 그는 항상 작고 두툼한 메모 노트를 소중하게 가지고 다녔다. 그 안에는 그의 치밀한 계획과 그 실천 과정 그리고 결과가 들어있었다. 불쑥 떠오르는 아이디어도 있고 또 잊지 않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메모했다. 그는 내게 자기 메모 노트가 없어지면 망한다고 했다. 기자의 수첩과는 또 다른 효용의 메모였다.
전혀 의미가 없는 메모도 있는 것 같다. 박근혜 대통령 당시 장관을 하던 친구가 있다. 그가 국무회의에 참석하고 나서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가지고 온 문어체의 원고를 또박또박 읽어. 그러면 장관들은 모범생 같이 그 내용을 수첩에 그대로 또박또박 쓰고 있어. 이해할 수가 없었어. 회의가 끝나면 대통령이 말하거나 읽은 것들이 바로 그대로 프린트되어 장관들에게 배포되는 데 왜 그렇게 하느냐 말이야? 내 옆에 있던 다른 장관도 이상한지 ‘이게 회의입니까?’라는 말을 했지. 그 장관도 나 같이 몇달 안 하고 잘렸지. 나는 수첩에 받아 쓰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한번 대통령과 눈이 마주친 적이 있어. 머쓱하더라구.”
장관들의 그런 받아쓰기는 좋은 메모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내가 해왔던 메모는 어떤 것일까.
법정에 증인으로 나간 적이 있었다. 검찰과 변호인측 그리고 재판부로부터 질문이 폭포같이 쏟아졌다. 그들의 직업적 눈길은 의심 자체였다. 들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에게 하는 말은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말하는 도중에 나는 여러 권 가지고 온 나의 메모수첩을 보여주었다. 내 메모를 본 순간 그들은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고 입을 다물었다.
나는 메모광이다. 매일매일 밀도 짙은 소설같이 시간별로 자세히 적어두었다. 만난 사람의 표정과 대화내용, 그의 어조와 내가 느꼈던 감정까지 수첩에 빈틈없이 적어두곤 했다. 그들이 무심코 던진 그들의 한마디나 무의식적인 행동 그리고 주변의 특징적인 광경까지 적어두기도 했다.
일례로 JMS의 교주를 상대로 소송을 하면서 내가 메모한 내용은 원고지 분량으로 치면 1000장이 넘었다. 12.12군사반란을 재판하는 법정에 가서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의 직접적인 진술을 들었다. 하루에 꼬박 8시간씩 30일 동안 가지고 간 공책에 메모를 했다.
전두환 대통령이 휴정시간에 속기사 여직원과 말을 나누는 것도, 그 아들들이 아버지에게 욕을 하며 달려드는 방청객을 제압하는 것도 묘사해 두었다. 기자들은 대부분은 검찰이 주는 자료를 그대로 받아쓰는 것 같았다. 그들은 오후 3-4시 마감시간이면 썰물같이 법정을 빠져 나갔다.
나는 나대로 언론이 놓쳐버린 것까지 내가 본 상황을 철저히 메모해 두었다. 우연히 그런 사실을 알게 된 일본의 시사잡지 <문예춘추>에서 작가를 보내 나의 법정 메모들을 요청했다. 그 얼마 후 <문예춘추>에서는 한국의 12.12군사반란에 대한 책을 발간했다. 일본의 문예춘추사에서는 한국의 언론보다 나의 법정메모를 더 믿어 준 것 같았다.
나도 언론기록보다 내 메모가 더 정확하다고 확신하고 있다.
나의 서재에는 지난 30년 동안의 메모가 천정까지 책장 가득히 들어차 있다.
그렇게 메모광이 된 동기가 있다. 중학교 2학년 무렵이었다. 교실에서 옆에 있는 친구가 선생님의 모든 말을 작은 수첩에 적었다. 심지어 선생님의 농담까지 적었다. 그 친구는 시험 때 따로 공부를 하지 않아도 성적이 좋았다. 선생님 말을 들으면서 메모하는 순간 머리 속에 그 내용들이 확실하게 들어박히기 때문에 나중에 따로 시험공부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언제든지 그 수첩만 다시 뒤져보면 지나간 수업시간이 현실이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친구에게 귀중한 것을 배웠다.
그 친구는 대형 건설회사에 말단 직원으로 들어가 사장으로 끝을 맺었다. 현장을 지키면서 세밀하게 메모를 하면서 업무를 지시하고 후에 대형 교량 같은 결과물을 보면 보람이 있다고 내게 말한 적이 있다.
노년이 된 지금도 나는 기도같이 매일 삶의 메모를 한다. 매일 블로그에 올리는 글들이 그것이다. 매일매일 마주치는 일이나 우연히 떠오르는 생각을 원고지 10장 분량으로 흰 모니터 위에 메모하는 것이다.
사람의 말이 기록이 된 것이 가장 귀한 보물이 되는 게 아닐까. <조선왕조실록>도 말이 글이 된 거다. <성경>도 말씀이 요약되어 글이 된 게 아닐까. 그걸 메모한 사람들의 역할이 큰 게 아닐까.
되돌아보니까 내가 써 왔던 메모는 귀중한 삶의 재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