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시선] 욕심과 집착에서 벗어나려면

“돈이나 자리가 아닌 다른 것을 선택하기로 했다. 그걸 단념이라고 해도 좋고 항복이라도 해도 상관이 없다. 그냥 아무것도 원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본문 가운데) 사진은 눈 쌓인 백담사 마당을 스님들이 걷고 있다. 

나와 친한 선배가 대기업 임원인 동생의 걱정을 이렇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동생 녀석이 여비서와 바람이 났어. 그 여자가 자기 행복의 전부라면서 가정까지 버리고 집을 나갔어. 꼭 그렇게 해야하나?”

그 형은 황당해하는 표정이었다. 그의 동생은 정말 그 여자 없이는 행복할 수 없는 것일까. 그에 대한 대답은 또 다른 고교동창이 오래 전 했던 사랑의 이런 고백이었다.

“옛날에 내가 미쳐있던 여자가 있었어. 이혼 하고 그 여자와 살 생각까지 했었지. 그러다가 어쩔 수 없이 헤어졌어. 그때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어. 세월이 흘렀지. 그런데 나는 지금 멀쩡해. 그때 왜 그랬는지 몰라. 그 여자 없이 살 수 없다고 생각했던 건 내 환상이 아니었을까?”

사랑이 아니라 집착인 경우도 있는 것 같다. 방송에 자주 나오는 미남인 의사친구가 있다. 그가 어느 날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우연히 한 여자와 만났어. 그런데 이 여자가 나에게 너무 집착하는 것 같아. 한번은 내가 와이프를 데리고 운전을 해서 스키장을 가는데 계속 문자를 보내는 거야. 당혹스럽더라구. 아내와 함께 스키를 타는 데 멀리서 나를 지켜 보는 거야. 그 여자는 나 없이는 행복할 수 없다구 하는 데 난 소름이 끼치더라구. 비극이 눈앞에 있는 것 같았어.”

40대 중반 잠시 로펌에 있었던 적이 있다. 같은 로펌에 국회의원에 당선된 변호사가 있었다. 그는 여당 대표의 최측근으로 출세 가도를 달리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사석에서 그가 이런 말을 했다.

“법조인이라면 판사를 해보고 국회의원을 해 봐야 해. 자리가 돌아오면 장관도 경험해 보는 게 좋지.”

행복의 조건으로 그런 자리가 내 머리 속에 입력이 되어 있더라면 부럽고 그 앞에서 기가 죽었을 것이다. 대통령 앞에서 비굴해지는 것은 자리에 대한 욕심 때문이다. 재벌 앞에서 비겁해 지는 것은 돈을 얻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다. 가치관이 같으면 그들의 노예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글 쓰는 변호사’라는 전혀 다른 방향을 선택했다. 가치관이 다르면 그리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면 그런 것들이 부럽지가 않았다.

평생 돈을 신으로 모시고 산 부자를 본 적이 있다. 하수구에 빠져들어간 동전 하나를 찾기 위해 온통 정원을 파헤치면서 자식들에게 돈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는 수천억의 재산가라는 목적을 이루었다. 그런 그가 마지막에 폐섬유증이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번 돈들을 전부 불에 태워버리거나 아니면 바다에 던져버리고 싶어요.”

속았다는 절실한 후회가 담겨있는 가슴 서늘한 말이었다.

내가 아는 검사가 있었다. 대단한 배경에 능력도 뛰어났다. 그는 검찰총장이 목표였고 정치권으로 나가 마지막 목표는 대통령인 것 같기도 했다. 그의 인생가도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암이라는 죽음의 초청장을 받은 것이다. 그의 살이 하루가 다르게 빠지면서 바짝 말라 갔다.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그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무슨 검사 뼈다구를 타고 태어났다고 그렇게 출세하려고 발버둥쳤는지 몰라.”

세상은 사람들의 머리 속에 가짜프로그램을 깔아놓은 것 같다. 돈이나 지위가 없으면 불행하다고 착각하게 하면서 그것들에 집착하게 만든다. 손에 넣으려고 애쓰고 잡으면 꾹 움켜쥐고 잃지 않으려고 걱정과 근심 속에서 살게 한다. 그런 집착에 짓눌려 인생을 맛있게 즐기지도 못하는 것 같다. 예전부터 현자들은 집착과 욕심을 내려놓으라고 하지만 그게 내려놓아지는 것일까. 누르면 누를수록 용수철처럼 더 강하게 튀어 오르는 게 욕심과 집착이 아닐까.

나는 그런 것들과 어떻게 관계를 설정할까를 비교적 일찍 생각한 셈이다. 먼저 그릇이 안 되는 내 주제를 알게 됐다. 피래미가 상어가 되는 꿈을 꾸는 것은 비극도 되고 희극도 될 것 같았다. 처음에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어도 괜찮아 괜찮아’ 하면서 나를 위로하기도 했다. 머리 속에 입력된 프로그램들이 아무래도 가짜 같았다. 그 동안 속고 있었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돈이나 자리가 아닌 다른 것을 선택하기로 했다. 그걸 단념이라고 해도 좋고 항복이라도 해도 상관이 없다. 그냥 아무것도 원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좀 더 고상하게 표현하면 ‘뜻대로 하소서’나 ‘내맡김’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시선이 바뀌니까 욕심과 집착이 옅어지는 걸 느꼈다. 사회가 입력시킨 가짜 프로그램에 속았다면 자리와 돈만 따르다가 세월만 보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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