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친일논쟁③] 해방후 초대 민선 경기도지사 구자옥…”죽은 당사자는 결백을 증명할 수 없었다”
전두환 정권이 탄생한 후 모든 현역장교들이 국난극복기장이라는 걸 받았다. 당시 나는 육군 장교였다. 서민의 아들로 국방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군대에 간 것이다. 국난극복기장은 군복에 다는 장식 같았다. 그런데 나는 국난을 극복한 기억이 없다.
한참 뒤 세상이 바뀌고 12.12의 군사행동이 국난극복이 아니었으며, 군사반란이라고 정의가 바뀌었다. 국난극복기장을 기계적으로 받은 모든 장교들이 군사반란범으로 지탄받는다면 그게 타당한 것일까. 그때 그 시간 우연히 군복을 입고 있었을 뿐이다. 그 시절 군조직 내에서 나 혼자 기장을 받지 않겠다고 튀는 행동을 할 수 있을까. 그냥 받고 어딘가에 던져두면 되었던 것이 아닐까.
해방 후 60년만에 벌어진 친일반민족행위 규명도 지탄당하는 입장에서는 그 비슷할 것 같았다.
일제시대 사회단체에 이름이 올라가 있으면 친일파의 낙인을 찍는 경우가 있었다.
2008년 여름경 나의 법률사무소로 60대 중반의 신사가 찾아왔다. 명문고등학교와 대학을 나오고 일평생 이 사회에서 엘리트로 성실히 일하면서 무난히 살아온 분 같았다. 그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 할아버지는 일제시대 YMCA총무를 하면서 조선의 기독교를 이끌어온 지도자입니다. 또 독립운동인 흥업구락부 사건 주동자로 온갖 고문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공로로 할아버지는 해방 후 첫 민선 경기도지사가 됐죠. 그 살벌한 시대에도 할아버지는 친일파 혐의를 받은 적이 없어요. 그런데 이번에 생긴 위원회에서 우리 할아버지를 친일파라는 겁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위원회에서 보낸 통지문을 내 앞에 내놓았다. 그의 할아버지가 일제말 전쟁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국가의 채권을 판매하는 행사에 참여했다는 것이었다. 그가 말을 계속했다.
“험난한 시대 상황 속에서 할아버지가 친일단체 결성식에 참여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가두 채권 판매도 종교계 인사로 강제동원되어 행사장에 서있었습니다. 그것은 감리교회와 조선 YMCA를 지키기 위해서 한 것입니다. 그게 어떻게 친일파일 수 있겠습니까? 경기도지사인 할아버지는 6.25전쟁 당시 자리를 사수하라는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피하지 않고 버티신 분입니다. 당시 제가 아홉살이었는데 할아버지와의 이별을 지금도 잊을 수 없어요. 뜨거운 7월 대낮에 총을 들고 들이닥친 인민군과 완장들이 할아버지를 체포해 끌고 갔습니다. 방에 혼자 남은 저를 안간힘을 다해 돌아보시던 할아버지의 눈을 평생 잊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저도 친일 청산에 찬성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해방 후 친일파에 대한 증오의 감정이 들끓을 때도 오히려 존경받던 할아버지가 왜 6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친일파가 되느냐는 겁니다. 국가를 바로 세우기 위해 식민지 청산작업이라면 제대로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위원회는 국가입니다. 이런 식으로 민족을 분류해서 특정인들에게 친일파 딱지를 붙이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는 것이고, 민족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꼴이 된다는 생각입니다. 저는 지금에 와서 하는 친일파 색출에 정략적이고 이념적인 의도가 있다고 봅니다. 국가가 친일여부를 판정할 때면 역사와 민족 앞에 한 사람의 억울한 친일인사를 만들지 않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닙니까?”
나는 그의 대리인이 되어 위원회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친일단체 결성 명단에 들어있는 그의 할아버지 이름을 더 중시했다. 죽은 그의 할아버지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수 없었다. 소송에서 패소하자 그 손자는 이런 말을 했다.
“이런 식으로 수천명의 친일파를 만들어내면 그게 과연 어떤 결과를 만들까요? 민족이 통합될까요? 아니면 새로운 저항세력이 형성될까요? 저희 같은 사람들이 모여 어떤 감정을 품게 될지 국가가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한 서린 표정의 그가 사무실을 떠나면서 했던 저주 같은 소리였다.
변호사는 추상적인 이념보다는 구체적인 현실을 목격하는 입장이었다. 대를 위해서 소가 그렇게 희생되어도 좋은 것인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