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친일논쟁②] 해방공간 월북화가 정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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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가 친일파라구요?”
한 유튜브 방송에서 실버타운에 관한 말이 여성의 낭낭한 목소리로 흘러 나오고 있었다. 듣다 보니 낯익은 얘기였다.
몇 달 전 내가 블로그에 올린 글을 그 유튜버는 출처를 밝히지 않고 마치 자신의 의견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끝에 자기의 독특한 평가를 덧붙여 놓았다. 나의 글이 그렇게 도용당한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내가 내놓은 의견이 다른 형태로 확산되는 것이라는 생각에 이의를 제기해 본 적은 없다.
무심코 내 블로그를 보다가 이상한 댓글이 달린 걸 봤다. 실버타운에 관한 글에 대해 나를 욕하는 글이었다. 다른 유튜버가 덧붙인 개인적인 의견에 내가 책임을 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참아야지 별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런 오해가 만일 친일파의 딱지로 붙여졌다면 그 피해는 엄청 크다.
2008년경 어느 날 나의 법률사무소로 나이 지긋해 보이는 남자가 들어섰다. 책상 앞 의자를 권하자마자 그는 흥분한 기색으로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친일파 화가라고 인터넷에 올라 있습니다. 일제시대 아버지는 신라의 원술랑 출정 그림을 그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 잡지의 편집자가 그 그림 밑에 ‘나가자, 싸우자’라는 표어를 붙였어요. 친일반민족행위를 색출한다고 얼마 전에 생긴 위원회가 그걸 보고 아버지를 친일파로 결정했어요. 이의신청을 해도 전혀 먹혀들지 않고 도대체 어디 가서 호소할 데도 없습니다. 변호사 사무실을 돌아다녀도 ‘우리는 역사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면서 전부 거절하더라구요.”
그는 해방 무렵 월북한 정현웅 화백의 아들이었다. 일제시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정현웅은 독학으로 그림을 그려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여러 차례 입상했다. 지금도 평양미술관에 그의 그림들이 걸려있다고 했다. 나는 조용히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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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우리 가족은 뚝섬에서 가난하게 살았어요. <동아일보>에서 삽화를 그리던 아버지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아 쌀 한톨 배급받지 못했어요. 아버지는 대중잡지에 삽화를 그려 암시장에서 쌀을 샀어요. 먹고 살기 위해 그림을 그린 것에 대해 왜 친일파라는 낙인이 찍혀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아버지의 경우는 일본인 편집자가 자기 입맛에 맞추어 그림에 표어와 각주를 넣은 건데 왜 아버지가 그 책임을 져야 합니까? 일제 말기에 친일이 아닌 잡지가 어디 있었습니까? 국가의 이런 식 친일파 몰기는 상식을 벗어난 겁니다. 독립운동을 하고 감옥에 들어가야만 애국자입니까? 아버지뿐 아니라 일제 말 그 시절 힘들게 살아가던 사람들을 오늘의 잣대로 재단하는 건 너무 순진하거나 아니면 악의적인 의도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어요. 월북한 아버지 때문에 자랄 때 저는 숨소리 한번 제대로 내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친일파의 아들이라뇨”
그는 억울할 것 같았다. 그런 결정을 받은 게 화가만이 아니다. 그 시절 가요를 부른 가수도, 대본에 따라 연기를 한 배우나 만담가도 일제의 정책에 협조한 가사나 대사가 있었다고 친일파로 결정통지가 갔다고 전해 들었다. 이미 죽은 분들을 그렇게 단죄해서 살아있는 후손들에게 주홍글씨를 붙여 주는 게 과연 타당한지 의문이었다.
국가를 대표하는 위원회는 민족정기와 정통성을 찾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위원회에 찍히면 현실적으로 저항하기가 불가능했다. 법은 친일파가 아니라는 증명을 후손보고 하라고 했다. 죽은 조상이 그렇지 않았다는 걸 증명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공평하지 못하게 만들어진 법이었다. 시대를 뒤흔드는 바람에 닻이 되어야 할 법원도 위원회 편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막막해 하던 정현웅 화백의 아들은 위원회에 대한 이의신청이나 법원에 대한 소송은 희망이 없다며 아예 기대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투쟁 방법으로 글을 쓰는 것을 선택했다. 그는 자신이 겪은 고통과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한자 한자 적어 시사잡지 <월간조선>에 ‘나의 아버지가 어떻게 친일파란 말입니까?’라는 제목으로 기고했다. 아버지에 대한 판단을 세상과 역사에 맡긴다는 의지였다. 그 얼마 후 민족문제연구소와 위원회는 정현웅 화백에 대한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을 취소했다. 용기있는 아들의 승리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 대부분은 그렇게 하지 못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