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친일논쟁⑪] 춘원 이광수의 감추어진 이야기들
낡은 책 속 소년의 울음소리
황학동의 벼룩시장 구석에 낡은 책들이 폐지 더미가 되어 수북이 쌓인 채 비를 맞고 있었다. 우연히 그중 한 권이 내 눈에 들어와 천원을 주고 사서 가지고 왔다.
얼룩이 지고 누렇게 변색된 그 책 안에서 어린 소년의 처절한 울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구한말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어린 소년이 내게 하소연을 했다. 소년이 열 살 무렵 마을에 콜레라가 돌았다. 약도 의사도 없는 시절이었다.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가 열흘만에 병에 걸려 죽었다. 마을 사람들은 전염병이 번진 그 집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소년은 수레에 아버지의 시신을 싣고 죽을 힘을 다해 끌고 간다. 가마니를 덮은 아버지의 발이 삐져나와 수레의 끝에서 덜렁거리고 있었다. 소년은 어린 여동생과 살아야 했다. 아궁이에 불을 때 밥을 짓기 위해 낫을 가지고 뒷산에 가서 마른 풀을 베다가 손가락을 다쳤다.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소년은 서러움에 엉엉 목놓아 울고 있었다.
아무도 그 소년을 안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소년은 영리했다. 그래도 살아남았다. 그는 구한말 정부에서 학비를 대주는 유학생 시험에 합격해서 일본 중학교로 유학을 간다. 여름방학에 돌아온 그는 할아버지가 보리밥을 물에 말아 딱딱한 열무줄기의 김치와 함께 먹고 있는 걸 봤다. 이빨이 없는 노인은 잇몸으로 열무 줄기와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중학생인 소년은 방학 동안 일본 헌병대에 가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서류 한 장을 써주는데 5전을 받았다.
학교를 졸업한 소년은 조선의 오산학교 선생이 되겠다고 지원서를 넣었다. 기독교계 학교인 그곳에서는 ‘사도신경’을 인정하는 것으로 믿음을 알려야 하는 것 같았다. 그는 일본 중학교를 다닐 때 신약성경을 200번 이상 읽고 기도도 열심히 했다. 하지만 그는 처녀가 혼자 애를 낳는 걸 확신할 수 없었다. 죽은이가 부활하는 것도 의문이 남았다. 그는 양심상 그걸 믿는다고 하고, 교사로 취직할 수 없었다.
그는 지독히도 정직한 사람이었다. 학교는 그를 받아주겠다고 했지만 양심상 그 학교에 선생님으로 있을 수 없었다. 황학동 벼룩시장 바닥에서 비를 맞으며 나를 기다리던 책속의 소년은 일제시대의 소설가이자 언론인 이광수였다.
나는 국립중앙도서관에 가서 그의 흔적을 살폈다. 지하 서고에 그의 낡은 자서전이 한 권 남아 있었다. 오래된 표지가 만질 때마다 조각이 되어 부스러졌다. 예전의 납활자로 찍은 깨알 같은 작은 글씨들이 오글거리고 있었다.
천재성을 가진 그는 장학금을 받아 와세다대학에 가게 됐다. 그가 대학 시절 쓴 소설이 전 조선 젊은이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는 현상 너머의 본질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뭔가 잃어버린 나라를 위해 나서야 했다. 그는 중국 상해로 갔다. 상해에는 홍명희와 신채호 그리고 조소앙이 독립운동을 하겠다며 망명해 있었다.
홍명희의 방에서 살면서 얼마 동안 그들과 함께 지냈다. 그들은 혈기는 있지만 막상 어디서 뭘 해야 할지를 몰랐다. 홍명희는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라는 작품을 탐독하고 있었다. 신채호는 하루종일 상해의 책방을 순례했다. 돈이 없으니까 조선에 관한 책자를 보면 서가 사이에 서서 공짜로 읽었다. 책방 주인에게 핀잔을 들으면서도 다음날이면 또 가서 중요한 부분을 베꼈다. 신채호는 고대 조선사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조소앙은 예수 부처 등 여섯 성자의 가르침을 연구하여 새로운 종교를 만들겠다고 코란을 읽고 있었다. 그들의 독립운동이었다.
얼마 후 이광수는 그들과 헤어져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거기서 기차를 타고 시베리아대륙을 1년여 돌아다녔다.
조선 사람들은 감자와 오이를 심어 팔고 러시아인들의 빨래를 해주기도 했다. 조선인들 모두가 가난했다. 그는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무리하게 동포들의 돈을 뜯는 단체를 보고 눈쌀을 찌푸렸다. 그는 러시아 땅에 사는 조선인들이 유럽전쟁에 끌려가는 모습도 봤다. 그는 조선인들이 독립을 하기위해서는 먼저 실력을 갖추고 잘 살아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는 다시 동경으로 가서 공부를 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의 철학이 담긴 독립선언문을 작성한다. 그러나 삼일독립운동은 실패한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공허했다. 그후 그의 사회구조에 대한 인식과 이념적 지향이 바뀐다.
3등국가인 조선이 세계 최고의 경제대국 군사대국이 된 일본과 기왕에 합쳤다면 1등국민의 혜택을 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솔직한 생각을 글로 발표했다. 변방의 식민지인으로 남을 게 아니라 참정권을 얻어 조선인이 일본의 국회의원은 물론 총리가 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병역기피를 하지 말고 군대를 가야 한다고 했다.
6.25전쟁 당시 그는 북한으로 끌려가 죽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그는 친일파였다. 2002년 대한민국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했다. 그는 공식기록으로 반역자가 됐다.
변호사인 나는 미국에 살고 있는 그의 딸에게 “아버지에게 친일파의 딱지를 붙인 그들과 한번 싸워보라”고 그 시대를 살았던 동료 소설가 김동인의 가족을 통해 간접적으로 권한 적이 있다.
민족과 국가에 대해서도 사람들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친일파의 프레임을 씌워 생각을 통제하는 사회가 과연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인정하는 자유민주주의일까, 이런 의문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