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친일논쟁⑫] 두산그룹의 뿌리 박승직상점의 경우

네비게이션으로 내가 갈 곳을 정하고 거리뷰를 터치하면 그곳의 광경이 입체적으로 나타난다. 나같은 아날로그시대의 사람은 그 정도만 해도 신기하다. 나는 문명의 발전을 보면서 가끔 이런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백년 전 거리풍경을 생생하게 볼 수는 없을까. 정지되어 있는 흑백사진을 조립한 게 아니라 그 시대의 역사와 질감을 느낄 수는 없을까. 역사를 알아야 현재를 알 수 있다. 오늘은 내가 국립도서관에 박혀 열심히 본 자료들이라는 내비게이션을 통해 거리뷰를 하듯 백년 전 종로거리를 묘사해 본다.

1910년대 경성의 종로통이 서서히 근대적 상가로 변하고 있었다. 서구식 건물들이 지어졌다. YMCA, 성서공회, 동일은행, 해동은행이 들어서면서 종로 빌딩가가 형성됐다. 도로에 아스팔트가 깔리고 그 위로 전차와 자동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종로거리를 따라 양품점들이 생겨났다. 유리로 된 진열장에는 외국상품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종로 거리에 조선인 포목상들이 자리를 잡았다.

1934년 당시 2층으로 증축해 새롭게 단장한 박승직 상점의 1층 소매부 모습

종로 일정목에 수남상회, 백윤수상점, 이덕유상점, 덕화상회, 이진우상점, 종로 이정목에 손종수상점, 태창상회, 덕창상회가 있었다. 종로 사정목에는 박승직상점이 있었다. 포목상들은 전기가 들어오자 야간에도 영업을 했다. 종로 포목상 중 가장 오래된 수남상회를 경영하는 김태희는 구한말부터 가게를 했다. 그는 한일합방 후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었다. 아이들도 신식학교에 보냈다. 상회를 자본금 오십만원의 주식회사로 바꾸고 장부도 서양식 부기를 도입했다. 그는 중국의 비단과 일본의 면제품을 매입해 지방 상인들에게 도매로 넘겼다.

종로 사정목에 있는 박승직 상점의 쇼윈도우에는 화려한 색깔의 주단 옷을 입은 마네킹이 서있고 점포 안에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성 점원들이 공손하고 친절하게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박승직 상점은 상호보다 외우기 쉬운 전화번호인 ‘광화문 5번’으로 더 잘 통했다. 매일 전화주문이 쇄도했고 물품들은 포장부를 거쳐 화물트럭으로 전국에 탁송했다. 경성지역은 직접 주문자에게 배달해 주었다. 경영자인 박승직은 가난한 소작인의 아들이었다. 그는 젊은시절 지게에 등잔용 석유통을 지고 망우리고개 근처의 집들을 돌아다니면서 석유를 팔았다. 이어서 그는 조랑말에 포목을 싣고 산골의 장터를 돌아다니다 배오개에 상점을 낸 것이다. 사업에 성공한 박승직은 일본의 대기업인 이토추상사와 합작투자회사를 설립했다. 박승직 상점은 오늘날 두산그룹의 시조이고 아직도 상점 터가 기념으로 남아있다.

종로의 육의전에서 조상 대대로 비단을 팔아오던 백윤수라는 인물은 박승직과 함께 종로 포목상 업계를 잡고 있었다. 그는 한일합방 이후 보신각 옆에 사무실을 얻어 ‘대창무역주식회사’라는 간판을 걸었다. 그는 청나라에서 비단을 수입해 팔았다. 그러다 총독부에서 비단 수입을 금지하자 청량리에 직조기 3백대 규모의 공장을 직접 세웠다. 일본인 직물공장에 뒤지지 않는 규모였다. 그의 아들 백낙승은 메이지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아버지 사업을 이어받았다. 그는 정황 판단이 빠르고 시류에 민첩하게 적응해 나가고 있었다. 그는 관동군 헌병대에 은밀하게 줄을 대어 만주로 포목을 밀수출했다. 일본의 이토추상사같은 대기업도 그의 판매망을 통해야만 만주에 직물을 수출할 수 있었다. 종로일대의 포목상들은 1차대전에 따른 일본의 호황을 배경으로 재미를 보고 있었다.

종로의 포목상들은 보수와 혁신, 전통과 근대, 반일과 친일의 조류에 얽매이지 않고 근대적 기업인으로 새로 태어나고 있었다. 그들은 중국, 일본, 영국 등 수입선을 다양하게 바꾸고 신해혁명으로 중국의 정세가 동요할 때는 재빨리 일본 상회로 거래선을 바꾸기도 했다. 그들은 총독부에 정치헌금을 내기도 하고 또 이면으로 독립자금을 대기도 했다.

당시 조선의 자산가는 대부분 왕족이거나 조선의 양반 관료출신이었다. 대원군의 장남인 이희, 고종의 아들인 이강, 이완용, 송병준 등이었다. 백윤수가는 상인출신으로 1911년 당시 조선의 최고 자산가 중의 한 명으로 진입했다.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지금’이 중요하고 ‘이익’이 중요하고 세상의 ‘시선’이 중요하다. 그 시대도 그랬던 것 같다. 나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와 여러 해 동안 법정에서 역사논쟁을 벌였다.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그들은 정치적 이념으로 역사를 보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시대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한번 보려고 노력했다.

일본의 대기업과 합작한 박승직상점은 친일일까 아닐까. 관동군에게 접근해 만주의 판매망을 독점한 경성 백윤수상점은 친일일까 아닐까. 그들은 이익이 남느냐 아니냐는 장사꾼의 잣대로 움직였다. 백년 후의 위원회는 과거를 정치적 잣대로 판단하고 있었다. 세상을 과연 하나의 자로만 재는 게 옳은 것인지 나는 지금도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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