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은 스스로 결정했으면…”
70년 넘게 살아오면서 여러 사람의 죽음을 지켜봤다. 친한 고교 선배가 암에 걸려 극심한 고통을 받다가 죽었다. 그는 마지막에 주치의에게 “죽여줘, 죽여줘”라고 간청했다. 화장장 소각로 앞에서 그의 주치의는 법만 허락하면 편안하게 저세상으로 가게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병든 그의 삶은 고통 자체였다. 회복 불가능이었다.
인간에게 살 권리가 있듯이 죽을 권리는 없는 것일까.
나와 친했던 원로 소설가가 암에 걸려 있었다. 어느 날 그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인생을 정리하려면 음식을 끊는 방법이 가장 낫겠죠.”
그와 나는 미국의 작가 스콧 니어링의 얘기를 하곤 했다. 구십세까지 글을 썼던 스콧니어링은 중환자실에서 의료기구에 둘러싸인 채 죽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자기집의 자기 방에서 굶어 죽겠다고 했다. 나와 친하던 그 소설가는 죽음의 방법을 그렇게 결정한 것 같았다. 그는 가보기를 소망했던 남미의 이스터섬을 갔다 와서 평생 살던 집의 자기 방에서 생을 마감했다. 닥쳐오는 암의 고통이 아니라 죽음의 방법을 스스로 결정한 것 같았다.
나는 지난 2년간 실버타운에서 지내면서 여러 노인들이 마주하는 죽음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 한 노인은 실버타운을 저승으로 가는 대합실이라고 자조적으로 표현했다. 맞는 말이었다. 푸른 잔디와 화려한 시설은 겉모습일 뿐 속은 고독과 완만한 사멸의 과정이었다.
실버타운의 다음 단계는 요양병원이었다. 그곳에서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다고 했다. 미이라 같이 뼈만 남을 정도로 바싹 말라도 현대의학은 사람을 살려놓기도 했다.
수명이 중요한 게 아니다. 십년 이십년을 좀비같은 상태로 침대에 누워있으면 그건 지옥이다. 노인들이 정작 무서워하는 것은 그런 죽음의 과정이다. 노인끼리 모여 서로 죽음의 방법을 말하는 걸 듣기도 했다. 어떤 노인은 목을 매달 줄을 준비해 놨다고 했다. 또 다른 어떤 노인은 프로포플을 구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들의 희망은 고통을 받지 않고 편하게 죽는 것이었다.
어떤 부인이 이런 얘기를 했다. “스위스에 안락사를 신청하면 모든 걸 깨끗이 해결해 주고 화장 해서 유골까지 택배로 집에 전달해 준대요. 한국사람도 벌써 몇백명이 그렇게 했대요.”
노인들은 저승길을 편하게 가고 싶어 했다. 그러고 보니 기억의 먼 언저리에서 내 아버지 어머니의 마지막 광경이 떠오른다.
나는 중환자실에서 아버지의 임종을 지켰었다. 심장박동이 멈추려고 하자 의사는 전기충격을 가했다. 의사는 자극을 주기 위해 손가락으로 아버지의 눈을 깊이 찌르기도 했다. 그건 치료가 아니고 고문같았다. 아버지가 완치될 가능성은 없었다. 아버지가 내게 말했다.
“어차피 한번 죽는 건데 더 이상 전기충격은 하지 말라고 해라. 그걸로 두번 죽고 싶지는 않구나.”
나는 중환자실 담당 의사에게 연명치료를 거절했다. 아버지는 졸립다면서 편안히 저세상으로 건너갔다.
나는 어머니의 임종도 지켰다. 맥박과 호흡이 위험수위에 이르자 여러 명의 의사들이 긴급조치를 했다. 그 모습은 마치 어머니가 바늘 지옥에 있는 느낌이었다.
의사들이 다시 조치를 하려고 할 때 어머니는 제발 하지 말아달라고 마지막 힘을 다해 손사래를 쳤다.
나도 어느새 노인 나라에 진입했다. 나는 중환자실에서 죽고 싶지 않다. 정든 집의 내 방에서 조용히 죽고 싶다. 당하는 죽음이 아니라 맞이하는 죽음을 선택하고 싶다. 살아 나올 게 아니라면 병원은 의미가 없다. 낙엽은 아직 윤기가 있고 떨어질 때 떨어지는 게 아름답지 않을까. 겨울 나무에 매달려 바람에 시달리는 쭉쟁이의 모습은 비참하다.
드리스 판 아흐트 네덜란드 전 총리 부부가 집에서 동반 안락사로 임종을 맞았다. 부부는 함께 손을 잡고 죽음을 맞이했다. 존엄성을 유지한 채 맞이한 죽음 같았다. 세상에 나왔다 가는 건 신의 결정인지 몰라도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은 스스로 결정했으면 좋겠다.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도 주지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