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현대의 은자’ 김민기 선배를 보내며
한 언론인이 그의 죽음을 알려왔다. 그림자같이 조용하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침이슬’이라는 노래를 만들고 대학로에서 학전이란 소극장을 하던 김민기씨다.
변호사인 나는 법정에서 진정한 한 인간을 만났었다. 그게 바로 김민기였다. 법망에 걸려든 한 가수의 재판을 할 때였다. 그 가수는 비가 오는 날 감옥 안에서 노래를 지어 내게 보내기도 했다. 나는 법이 그의 본질을 보기를 원했다. 그 가수를 키운 김민기씨를 증인으로 신청했다.
김민기씨는 법정에 나와 그 가수는 세상이 폄하하는 딴따라가 아니라 진정한 예인(藝人)이라고 했다. 그 가수의 본질을 통찰한 한마디였다. 형량을 경감하기 위한 입에 발린 말이 아니었다. 깊은 통찰이 들어있었다. 40년 가까운 법의 밥을 먹으면서 변호사인 내가 느낀 진정한 친구란 그런 것이었다. 판사들 앞에서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라는 확신을 말해주는 사람이었다. 김민기씨가 바로 그런 귀인이었다.
김민기씨가 친한 친구 서너명과 지방으로 여행을 간 적이 있다. 우연히 나도 그 여행에 끼어들었다. 사실 그는 나보다 두 살 위였고 같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나왔다.
모텔방에서 같이 자고 부근의 허름한 식당에서 콩나물 국밥으로 아침을 먹으면서 그와 속깊은 여러 얘기를 나누었다. 지금도 내 인식의 벽에 각인된 그의 몇 마디가 있다.
첫번째가 탄광 얘기였다. 그가 태백 쪽인가 어딘가로 광부 일을 해보려고 간 적이 있다고 했다. 광산에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삽으로 석탄을 퍼서 트럭의 적재함에 올리는 일이었다. 하루에 천 번 삽질을 하니까 허리가 끊어지는 것 같더라고 했다. 그는 아버지가 사이다 공장을 했었다고 내게 말했다. 가난한 집 궁상맞은 아들은 아니라고 했다. 명문대학을 나온 최고의 엘리트였다. 나는 그가 왜 탄광으로 갔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는 사상이나 이념을 내게 얘기하지 않았다. 아니 동학에 관한 자료를 가지고 있는데 내가 아니라 김지하씨에게 넘기겠다고 하는 말은 들었다. 그는 너무 음악에 빠져 있었다고 하면서 다시 그림을 그렸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내게 김제쪽에서 농사 짓던 얘기도 해주었다.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밭에 김을 매는 일이 정말 힘들더라고 했다. 한여름 밭에서 일을 하려면 무릎걸음으로 밭고랑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야 했는데 땅에서 솟아오르는 열기보다 독오른 풀들의 날카로운 끝이 눈을 찌르는 게 더 고통스러웠다고 했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내가 아들에게 어부 경험을 시켜보고 싶다고 하자 그는 정색 하며 말렸다.
그는 겨울바다가 너무 추웠다고 했다. 보통 사람에게는 바다가 낭만일지 몰라도 어부에게는 생존 투쟁의 장이더라고 했다. 그는 몸으로 세상 바닥을 샅샅이 체험한 현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로 돌아와 헤어질 무렵이었다. 그는 자기가 하는 소극장 학전의 사무실이 가장 편하다면서 거기서 차를 세워달라고 했다. 그는 어린이 뮤지컬을 구상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일에 미쳐서 살았던 것 같다. 그에게 일은 놀이이고 쉼이기도 한 것 같았다. 일터가 수행터이기도 한 것 같다. 가수 김광석을 천재라고 하면서 대학로에 동상을 세워주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이따금씩 만난 내게 어려운 속사정을 내비치기도 했다. 젊어서 만든 노래들의 저작권을 모두 도둑맞았다고 했다. 자기가 하는 소극장이 재정적으로 어려운 걸 알고 도와준다고 제의한 사람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사람이 카지노 재벌이라서 거절해야겠다고 했다. 힘이 들어도 깨끗하지 않은 돈은 받지 않는 개결한 성격이었다.
그는 내게 자신의 어렸을 때 별명이 ‘석구’라고 알려주었다. 나대지 않고 구석에 있기를 좋아해서 아이들이 그렇게 불렀다는 것이다. 그는 세상에 대해서는 ‘뒷것’이라고 자신을 표현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것을 가장 위대한 자질인 겸손으로 보았다. 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떠받들어 주고 우상을 만들려고 해도 그는 금송아지와 높은 의자를 거절하고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는 모습이었다. 과거를 팔아서 현재를 살지도 않았다.
김민기를 이 시대라는 시간 속에 들어왔다가 시간 밖으로 나간 ‘도시의 은자’라고 나는 평가하고 싶다. 예전의 무덤들 중에는 그 비석 옆에 ‘신도비’가 서 있는 경우가 있다. 지인들이 죽은 사람이 세상에 남긴 향기를 글로 새겨둔 비석이다.
벼슬자랑보다 신도비의 내용이 진정 그 사람이었다. 나도 그에 대한 기억 한 토막을 신도비의 문장같이 이렇게 글로 남겨 두기로 했다. 영정사진 속에서 그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무슨 쓸 데 없는 짓을 하느냐고 나무랄 것 같다. 잘 가시오 김선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