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친일논쟁16] 경성방직에 거액 대출해준 아루가 식산은행장

태극성광복 광고

변호사의 일을 하다가 우연히 일제시대의 경성방직이라는 회사와 마주쳤다. 경주의 최부자로 알려진 최준과 고창갑부 김성수 집안이 합작회사 ‘조선인 주식회사 설립운동’을 일으켜 만든 회사다. 물론 조선인 유지들과 일반국민의 공모가 중심이었다. 경영은 일본의 대학에서 경제와 경영을 공부한 신세대가 맡고 역시 일본에서 초첨단의 산업기술인 방직기술을 배운 신세대가 생산을 맡았다. 경성방직은 조선인만을 고용했고 조선 기술자에 의한 신제품을 생산했다. 일본제품에 뒤떨어지지 않는 품질이었다. 신제품의 이름은 조선의 자존심을 상징하는 ‘태극성’으로 했다. 3.1운동때 모두들 태극기를 가지고 나온 것을 떠올린 것이다.

경성방직은 동경의 상무성에 태극성 상표를 등록했다. 똑같은 상법이 한반도를 포함한 전 일본에 적용되고 있었다. 경성방직은 마케팅에서 ‘조선 장돌뱅이 기법’을 채택했다. 매일 새벽 4시가 되면 경성방직 직원으로 구성된 보부상 부대가 태극성 상표가 붙은 광목을 등짐으로 지고 서 있었다. 그들 앞에서 일본에서 유학을 한 젊은 사장의 이런 훈시가 있었다.

“여러분에게 회사의 운명이 달려있고 조선 민족의 경제독립이 달려있습니다. 우리 회사가 망해 여러분이 일본인이 경영하는 회사로 가면 그들에게 삶은 물론이고 영혼까지 빼앗길 수 있습니다. 우리 조선인끼리 똘똘 뭉쳐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합시다.”

경성방직의 보부상부대는 조선 각지와 만주까지 다녔다. 시골의 가게들은 경성방직 광목의 태극성 상표부분의 짜투리만 잘라 차일을 만들었다. 장바닥의 뙤약볕을 가리기 위해서였다. 태극성으로 이루어진 차일이 바람에 나부끼면 사람들은 다시 3.1운동을 하는 것 같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경성방직의 다음 제품은 ‘불로초’였다. 태극성보다 올이 굵고 값이 저렴했다. ‘불로초’가 신의주와 의주 그리고 만포진에서 인기를 얻었다. 국경지대에서 대량주문이 들어왔다. 중국사람들의 취향에 올이 굵은 ‘불로초’가 적중했다. 보따리 장사꾼들이 불로초를 사서 만주와 중국을 다니면서 팔았다. 경성방직이 일본의 기라성 같은 방직회사들을 제치고 조선시장의 상당부분을 점유했다.

이때 동아일보에 나온 경성방직의 시리즈 광고는 이랬다.

‘민족의 광목 태극성을 사랑해 주시오. 우리 모두 태극성 편이 되어 주시오. 조선 광목을 입으시는 것 이것이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 이익이 됩니다. 경성방직은 우리 자본으로 우리 기술로 우리의 딸들이 우리가 쓸 옷감을 만들고 있습니다. 만천하 동포 형제여. 우리민족의 회복을 위해 비록 옷감일망정 가격이 싸고 품질이 좋은 경성방직의 조선 광목을 쓰시기를 희망합니다.’

나는 자료들을 보면서 그 시절 어떻게 이런 민족의 회사가 차별의 벽을 뚫고 우뚝 설 수 있었나 의문이었다. 우연히 경성방직의 먼지가 쌓인 자료들 속에서 이런 부분을 보기도 했다.

취체역 박용희가 이런 발언을 한 기록이 있다.

“식산은행장인 일본인 아루가는 정권에 영향을 받거나 편견을 가진 인물이 아닙니다. 원칙에 충실한 사람입니다. 아루가는 은행 내에서 조선인 직원과 일본인 직원간의 차별을 철폐했습니다. (중략) 그는 조선인들을 평등하게 대우하고 함께 발전하는 것이 일본에게 더 이롭다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하략) 사진은 아루가 미츠토요 식산은행장

“설비자금을 조선식산은행에서 융자받는 게 좋겠습니다. 식산은행장인 일본인 아루가는 정권에 영향을 받거나 편견을 가진 인물이 아닙니다. 원칙에 충실한 사람입니다. 아루가는 은행 내에서 조선인 직원과 일본인 직원간의 차별을 철폐했습니다. 아루가는 조선인 기업인들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경주 최부자댁의 채무도 과감히 면제해 준 적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일본사람들에게 오해까지 받았습니다. 화신백화점을 하고 전국에 연쇄점을 내려는 조선인 박흥식에게 거액의 대출을 해줬습니다. 아루가는 우리 경성방직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합니다. 경성방직의 배경과 재무상황을 잘 알고 건전한 투자처로 인식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조선인들을 평등하게 대우하고 함께 발전하는 것이 일본에게 더 이롭다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경성방직은 조선식산은행의 대출을 받아 영등포에 새로운 공장을 증축하고 첨단장비들을 수입했다.

일제시대에 대해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던 내게 경성방직의 활동과 일본인들의 융자는 이해하기 힘든 경이였다.

그 시절부터 80년이 지난 후 변호사인 나는 죽은 경성방직 사장의 대리인자격으로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관 앞에 서 있었다.

“왜 경성방직이 그런 돈을 빌렸습니까? 일본 제국주의와 손을 잡고 사업을 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장을 친일반민족행위를 한 것으로 봅니다.”

조사관은 나를 준엄하게 꾸짖었다. 그런데 나는 그 말이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후일 읽을 누군가를 위해서 이렇게 작은 기록으로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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