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시선] “천대받던 기층민에게 조선 정부는 무엇이었나?”
변호사로 민족종교 단체의 소송을 대리하다가 문득 호기심이 일어 그 종교의 경전을 읽게 됐다. 경전 속에 있는 구한말의 애잔한 장면 하나가 가슴에 깊게 스며들었다.
시냇물가에 먹지 못해 기진맥진한 아버지가 누워있고 그 옆에 어린 딸이 있었다. 어린 딸이 작은 물고기 한 마리를 잡아 아버지 입에 넣어주었다. 잠시 후 아버지는 입에서 작은 물고기를 꺼내 딸의 입 속에 넣었다. 그 광경을 보면서 나는 속이 울컥했다. 머슴출신인 교주 강증산은 지옥같은 그런 세상을 둘러보면서 개벽을 꿈꾸었다.
2대 교주쯤 되는 차경석은 아버지가 동학도라는 이유로 참형을 당했다. 아들인 그는 머리가 없어진 아버지 시신을 찾아 업고 나오면서 하늘에 대고 울부짖었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없어지라고. 그는 왕이 되고 싶다고 울부짖었다.
일제시대가 되고 그는 수십만 도인을 이끄는 교주가 되었다. 조선총독이 그를 찾아가 인사를 하고 협조를 요청했다.
3.1운동이 일어나던 해 민원식이라는 한국인이 ‘협성구락부’라는 정치조직을 만들고 ‘신일본주의’를 내세웠다. 그가 주장하는 신일본주의는 일본인만의 일본이 아닌 조선의 토지와 인민을 포함하는 하나가 된 새로운 일본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그가 여덟살 때 동학을 믿던 집안이 쑥대밭이 됐다. 그는 부패한 조선에 한이 맺혀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고아가 되어 떠돌다가 청나라 상인에게 팔려 중국으로 갔다. 그는 중국에서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우연히 일본 정치인들과 인연을 맺게 된다. 통감부 개설과 함께 귀국한 그는 정치단체인 정우회를 만들어 활동을 벌인다. 그는 엄비의 조카딸 채덕과 결혼해 고종의 처조카사위가 된다.
그는 한일합방 후 이천 고양군수를 거쳐 중추원 부참의로 임명됐다. 그는 동경을 드나들면서 참정권 청원운동을 벌였다. 조선 출신 국회의원을 선출해 법률을 만드는 데 참여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는 조선인도 일본의 총리가 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의 주장은 많은 조선인에게 정치적 기대감을 주기도 했다.
3.1운동 후 총독부는 조선에서 천대받던 기생들을 제도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대동권번’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기생들의 권익을 보호했다. 대동권번의 기생들은 일본어와 일본노래를 배우도록 특별지원을 하기도 했다. 당국은 일본인들의 연회가 있으면 일본어와 일본노래를 하는 조선기생을 부르도록 하고 후한 댓가를 지불했다. 일본인이 몇백명씩 조선에 단체관광을 왔다. 조선기생들은 그들 앞에서 일본의 게이샤보다 더 능숙하게 일본 속요(俗謠)를 불러 그들을 감탄하게 했다. 총독부는 조선기생들의 공연장면을 영화로 찍어 일본과 조선에 전국적으로 순회상영을 했다. 총독부는 기생단체를 조직하고 지원한 결과에 대해 이런 보고서를 남기기도 했다.
‘반일음모의 소굴이었던 조선의 화류계가 일본과 하나되기를 원하는 봄의 꽃동산이 됐다. 일본어나 일본노래를 모르면 기생으로서의 품격이 떨어진다는 생각들을 하게 됐다. 독립을 부르짖던 조선 기생의 불순한 생각들은 이제 사라진 것 같다.’
총독부는 조선인의 저변층에 대한 순화공작을 치밀하게 했다. 천대받던 무당도 단체를 만들게 하고 면허제로 해서 자격을 주어 당국의 보호 아래 영업을 하게 했다. 총독부는 기층민중의 영혼을 바꾸는 심리공작을 하기도 했다. 고미네라는 일본인은 한국어에 능숙했다. 그는 김재현이라고 한국이름으로 바꾼 후 한국민 사이에 파고 들어 선동공작을 전개했다. 그 내용의 일부를 지금의 언어로 재구성하면 이렇다.
‘독립을 해서 다시 조선으로 돌아간다면 노비의 자식이 양반집 도련님과 같이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을까요? 조선에서 노비에게 나라가 있었나요? 조선은 왕과 사대부 양반들의 나라가 아니었나요? 노비 출신인 여러분은 그 나라에서 인간이었나요? 백정이나 무당은 인간 취급을 받으셨나요? 아버지가 양반인 서자들은 어떤가요? 실제로 행정을 다 담당하는 중인들은 소원이었던 군수가 될 희망이 있었나요? 여러분은 그런 나라로 되돌아가고 싶습니까? 우리 일본은 여러분이 수백년 동안 지고 있던 멍에를 벗겨주었습니다. 여러분은 평등권이 보장되는 일본 헌법 아래서 관리가 되고 기술자가 되어 자유로운 시민으로서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이제 한국인과 일본인이 피를 섞어 하나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한국의 남성은 일본여성과 결혼하십시오. 한국의 여성은 일본 남성과 결혼하십시오. 그리고 아기를 낳아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채워야 합니다.’
조선에서 천대받던 저변층의 영혼이 변하고 있었다.
변호사인 내가 자료를 통해 본 그 시대의 현실이었다. 역사학자들은 그들 영혼의 변화를 어떻게 평가할까. 그들에게 조선은 무엇이었을까.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그들의 변절을 비판하는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누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