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한글 창제 반대한 게 일본놈”이라는 손자의 이상한 답안
딸이 초등학교 4학년에 다니는 아들을 데리고 동해에 있는 나의 집으로 왔다.
“아빠 요새 쓰는 일제시대 역사에 관한 글 재미있어. 계속 써봐요.”
딸은 토론토대학에서 동아시아 역사를 공부했다. 그리고 뒤늦게 서울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게 됐다. 대화중에 딸이 이런 말을 했다.
“아빠 초등학교에 다니는 태윤이 역사문제 중에 세종의 한글 창제를 반대한 게 누구였느냐고 묻는 게 있더라구. 녀석이 답을 일본놈이라고 썼더라구. 왜 그렇게 썼느냐고 물었더니 공부 안 해도 대충 나쁜 건 일본 놈이라고 쓰면 정답이더라는 거야. 아이들 역사공부 문제 있는 거 아니야?”
딸의 말 속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뼈아픈 문제점이 들어있는 것 같았다. 어린 시절 내가 달달 외웠던 교과서도 그런 관념을 내 머리 속에 구겨 넣었었다. 나라를 빼앗긴 일제시대는 암흑이었다. 경찰과 헌병이 우리민족을 무참하게 살해했다. 제2차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그들은 놋그릇까지 빼앗아 가 총알을 만들고 한국 청년을 전장으로 끌고가 총알받이가 되게 했다는 것이다. 일본인에 대한 적대감을 가져야 할 것 같았다. 대학시절 까페에서 일본 사람을 만나면 시비를 걸어야 할 의무감 비슷한 걸 느끼기도 했었다.
나는 어느 날 서울대의 이영훈 교수가 방송에서 우리에게 주입된 역사인식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걸 들었다. 나는 이영훈 교수와 서울대 안병직 교수의 대담을 적은 <역사의 기로에 서서>라는 책을 사서 보았다. 안병직 교수는 지난 40년간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의 오류들을 말하고 있었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 때 우리 땅의 40%를 빼앗겼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어떤 때는 국토라고 하고 어떤 때는 농지라고 하는데 거짓 통계수치라고 했다.
조선말 임야는 국가소유였고 일제가 들어오면서 임야를 그대로 국유림으로 했다는 것이다. 농지도 기존 개인의 소유권을 그대로 인정하고 다만 등기를 하게 했다는 것이다. 안병직 교수는 1930년대 조선의 무역흑자와 경제성장을 얘기하면서 정직하게 말하면 수탈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그리고 일제 36년간 일본인들이 투자했던 것을 모두 빼앗기고 빈 몸으로 돌아간 그들이 과연 한국을 수탈했느냐는 것이다. 그는 교과서 내용들은 감정적인 민족주의로 쓴 잘못된 역사서술이라고 했다. 그는 현실 속에 있는 진실을 보고 편향된 역사관을 갖지 말자고 했다.
나의 인식 속에는 억지로 구겨 넣어진 쓰레기 같은 지식이 참 많았다. 일본뿐 아니라 초등학교 6학년 시절 교과서 안에는 소련과 중공에 관한 것들도 많았다. 교과서에 소련 사람들은 음침한 성격이라고 표현한 것이 오래 기억의 언저리에 걸려 있었다. 나이를 먹고 나서야 러시아에 톨스토이도, 도스토옙스키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린 시절 주입된 정보는 세상을 보는 잘못된 틀로 작용되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엄마의 말을 옆에서 듣고 있던 초등학교 4학년 손자가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를 반대한 것은 정답이 일본놈이 아니라 양반놈이었다고 말했다. 그 대답도 어쩐지 찜찜한 느낌이 들었다.
손자는 이렇게 말했다.
“양반놈들은 자기네 기득권을 지키고 싶어했대요. 일반대중이 알아듣지 못하는 자기들의 말과 글을 가지고 특권을 누리고 싶었던 거죠. 그게 한글 창제를 반대하는 이유였다고 하던데요? 민중이 너무 소통하면 안되니까요.”
손자의 말을 들으면서 이 사회가 검은 안개에 너무 오염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역사를 조선과 일본 양반과 상놈으로 나누어 차별을 강조해 적대시하고 증오감을 갖도록 하는 것 같았다.
오히려 일제하에 가난하게 살아온 부모에게서는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함경도 회령 출신인 아버지와 어머니가 일본과 일본인에 대해 나쁜 말을 하는 걸 나는 들어보지 못했다. 어머니는 학교 다닐 때 일본 여학생들의 깨끗함과 정직성 그리고 흰쌀밥이 든 도시락을 보고 부러워했었다고 말해주었다. 같은 나이인 장모님은 경성에서 아버지와 미제 자동차인 택시를 타고 호텔 레스트랑에서 스테이크를 먹은 얘기를 하곤 했다.
우리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었다. 겉으로는 미워하는 척하고 속으로는 부러워하는 면이 있었다. 그게 어디서 나온 것일까. 자존감이 부족했던 건 아닐까. 이제는 당당하게 그 시대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봐도 되는 때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