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시선] 경기중학, 정독도서관 그리고 나의 할아버지
나는 이따금 화동에 있는 정독도서관을 찾아간다. 내가 다니던 경기중학교 건물이 도서관으로 바뀐 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곳 벤치에 앉아 있으면 아스라한 기억 저편의 한 광경이 떠오른다. 입시 시험장에서 걸어 나오는 나를 향해 때 묻은 하얀 광목 한복을 입은 할아버지가 학부모들 사이에서 제일 앞에 달려온다. 아이들이 시험을 치르는 동안 학부모들은 영하 10도 아래의 추위 속에서 합격을 기원하며 서 있었다. 그 부모들이 경기장에 풀어놓았던 아이들을 데리러 오는 것이다. 우리 할아버지는 1등이었다. 달려오는 데 1등이 아니면 손자가 시험에서 떨어질 것 같았나 보다. 할아버지가 달려와 미소를 지으며 나를 양팔로 꼭 안았다. 할아버지의 품이 따뜻했다.
내가 합격을 했다고 하자 할아버지의 눈에서 하얀 눈물방울이 맺혔다. 잠시 후 굵은 눈물방울이 방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할아버지의 눈물 속에 어떤 회한이 들어있는지 어린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할아버지의 삶을 알지 못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에게 얻어들은 몇 마디가 전부다. 할아버지는 메마른 먼지가 일어나는 만주의 밭에서 하루 종일 일을 해도 밥을 먹기가 힘들었다고 했다. 왜 거기서 살게 됐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아버지도 거기서 살았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만주에 달짝지근한 먹는 흙이 있다고 했다. 배가 고플 때 그걸 먹었다고 했다. 먼 훗날에야 그게 어느 정도의 가난인지를 깨달았다.
할아버지는 훈춘에 살았다. 뜬금없이 한밤중에 괴한들이 침입했다. 중국군인지 마적인지 알 수 없었다. 긴 가죽장화를 신은 발로 다짜고짜 자던 사람들을 걷어 차더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한 입이라도 줄이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로 가서 일꾼노릇을 했다고 내게 말했다. 그곳도 사람들이 싸우고 죽고 무법천지였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상금으로 걸린 쌀 한 가마니를 얻기 위해 나간 씨름판에서 허리를 다쳐 평생 아프다고 하면서 소의 지라를 사다가 기름을 두른 후라이팬에 데쳐서 손자인 나와 나누어 먹었다. 나는 허리도 안 아픈데 그냥 같이 먹었다.
할아버지는 공부는 딱 2주일 동안 한글을 배운 게 전부라고 내게 말해 주었다. 할아버지 장부의 글씨는 전부 비뚤빼뚤 했다.
할아버지는 나를 명문학교로 밀어 넣어 살아가기 힘든 세상의 밑바닥에서 탈출시키려고 한 것 같았다.
내 고등학교 시절이다. 할아버지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다. 할아버지는 빈방에서 하루 종일 누워있었다. 할아버지는 자주 눈물을 흘렸다. 북에 두고 온 형이 보고 싶고 동생이 보고 싶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이따금씩 온 힘을 쥐어 짜 내가 공부하는 방으로 기어왔다. 그리고는 공부하는 손자 뒷모습을 한참이나 보곤 했다. 그 시절 내가 슬펐던 어느 날이었다. 검정 교복을 입은 채로 할아버지 곁에 누워 할아버지에게 넑두리를 했다.
할아버지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이불을 내게 덮어주고 꼭 껴안아 주었다. 할아버지의 품이 따뜻했다. 어느 날 할아버지는 잠을 자는 듯 저세상으로 건너갔다. 52년 전 일이다.
얼마 전 할아버지의 기일이 지났다. 이 땅에서 할아버지를 기억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다. 죽은 할아버지는 이 세상에 살았던 적이 있을까. 아니면 할아버지는 지금도 살아서 내 마음속에 함께 있을까.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는 나의 아들 딸이나 아내의 형식적인 의식은 의미가 없다. 나는 모든 형식을 없애 버렸다. 그리고 내가 할아버지의 나이가 됐다. 내 마음속에 남아 있는 할아버지는 내가 죽는 동시에 영원히 세상에서 없어질 것이다. 묘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남겨 두면 세상에 폐가 될 뿐이다. 오십년 넘은 할아버지의 묘를 파서 화장한 유골을 내가 보관하고 있다. 잔잔한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곳을 잡아 영원히 흙으로 돌아가게 할 예정이다.
내 마음의 무늬를 그린 이 추도의 글을 통해 할아버지가 후손들 마음에 잠시라도 기억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돌아가신 날 할아버지의 아버지의 어머니의 기억을 글로 쓰는 것이 나의 제사 방법이다. 이 글의 향기를 할아버지가 흠향하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