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이념 과잉’, ‘프레임 난무’ 시대에 살면서…
나와 친했던 고등학교 선배가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 기자 시험에 합격하고 사병으로 군대를 갔다. 그는 우연히 보안사령부로 차출되어 노태우 대위의 밑에서 몇 명의 다른 사병과 함께 일을 했었다고 했다. 그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이런 말을 했다.
“당시 노태우 대위는 입만 열면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라는 말이 자동 녹음같이 흘러나왔어. 한번은 같이 근무하는 사병이 어머니가 편찮으신데 휴가를 가면 안되느냐고 물었지. 그랬더니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해야 할 이 시국에 어떻게 개인적인 일을 도모할 수 있느냐고 하는 거야. 팔십이 넘은 노인이 된 지금까지도 그 때 일이 잊혀지지 않아.”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는 사람들은 대개 국회의원이 되고 대통령이 됐다. 내게 과거의 기억을 말해주던 그 선배가 이런 말을 덧붙였다.
“나중에 내가 편집국장을 한 후 신문사 사장이 됐을 때 노태우 대통령이 주요 언론인들을 초청해 함께 만찬을 했던 적이 있지. 나는 이상하게 예전의 인연을 말하면서 인사하기가 싫었어. 사병일 때 노태우 대위의 신혼 이삿짐을 날라주기도 했는데 말이야. 짐 실은 트럭의 운전석 옆에 있던 젊고 예쁘장한 여자가 김옥숙 여사였지. 내가 이불 보따리를 나르고 청소도 해줬다니까.”
나는 선배 내면의 복합적인 감정을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르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라는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워 뇌세포에 집어넣어야 했다. 펄럭이던 태극기가 저녁이 되어 내려올 때면 정지된 자세로 경례를 하며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라는 말을 주문처럼 외워야 했다.
군사훈련을 받을 때는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우리는 나라 지키는 영광에’라는 군가를 불러야 했다.
지금도 태극기 부대의 시위하는 옆을 지나가다 보면 그 구호며 군가들이 우리가 젊은 시절 앵무새같이 반복했던 내용들이다. 동해의 실버타운에서 나와 친했던 한 분은 태극기 부대의 시위가 있는 날은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면서 기차를 타고 광화문을 향했다.
나는 그 국가와 민족 속에 가족은 들어있는지, 만약 들어있다면 선 순위인지 후 순위인지 한번 물어보고 싶다.
내 기억의 깊은 곳에 아버지의 육성이 녹음되어 있다. 아버지는 대학에 다니다가 육이오 전쟁을 맞이했다. 점령된 서울에서 공산군은 아버지를 군대에 끌고 가려고 찾았고 서울이 수복이 되자 국군도 아버지에게 사병으로 전쟁에 참여하라고 명령했다. 아버지는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늙은 할아버지와 어린 형과 누나 그리고 아내를 대책없이 놔두고 군대를 따라갔다. 내가 어린 시절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이런 말을 하곤했다.
“내가 배속된 사단이 함경도까지 갔어. 전투 중에 하도 배가 고파서 다이너마이트 반죽을 먹기도 했지. 떡같이 부드럽고 달짝지근해. 흥남에서 배를 타고 후퇴해서 부산에 갔었지. 거기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어. 춤추고 노래하고 장사해서 자기 가족 벌어먹이고 말이야. 다섯살 네살 짜리 내 새끼들은 얼어붙은 겨울 피난길에 다 죽어버렸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싸우라고 했는데 내 가족은 아홉명이 죽었어. 거리에 총을 난사해 버리고 싶더라구. ”
아버지의 분노가 어떤 것인지 막연하지만 공감이 갔었다.
방송을 보고 있는데 작가인 김훈 작가가 화면 안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게 귀에 들어왔다.
“저는 정치적 구호보다 생활인들이 존중 받았으면 좋겠어요. 일제 시대 많은사람들이 자기에게 주어진 일들을 하면서 성실하게 생활했어요. 굳이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다고 지탄받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사회도 그런 생활인들이 대부분이예요. 그런 생활인들에게 애국이나 이념을 강요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이념보다는 생활인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국가와 민족이 절대이던 4백여년 전 런던의 뒷골목에서 가난하게 살던 로크는 개인이 국가보다 중요하다는 주장을 담은 책을 썼다. 불란서에서 루소와 볼테르가 그 책을 읽었고 그 생각은 불란서 혁명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민주주의의 근본은 그런 개인주의와 자유주의가 아닐까. 정치는 개인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것이고 종교는 개인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개인의 복지가 아니면 제도의 존재 이유가 희미해지는 건 아닐까. 이념이 과잉이고 허공에 인간들을 노리는 각종 프레임들이 난무한 세상을 보면서 한번 생각해 봤다.